중국 대동大同 운강석굴雲岡石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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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김진숙
2003년 05월 255호
지금 중국은 ‘사스’라는 괴질 전염병으로 온통 난리인 모양이다. 중국에 사는 선배들이랑 친구들이 걱정이 되어 몇 차례 안부전화를 해 보았더니 뉴스에서 듣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한다. 아무쪼록 병의 원인과 치료법이 하루 빨리 규명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몇 해 전 대학원에서 중국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분들과 함께 중국의 운강雲岡, 돈황敦煌 석굴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 후 또 한 차례 실크로드에 있는 돈황과 키질 지역 등의 석굴을 답사했다. 중국은 너무도 큰 나라이며 볼 것도 많기에 모든 것을 빠짐없이 둘러본다는 것은 힘들고 이처럼 불교유적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 석굴들을 테마로 하면서 그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것도 참으로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북경 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한 여덟 시간쯤 가면 대동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운강석굴은 이 대동 시내 중심가에서 버스로 약 20분 정도 걸리는 교외에 위치하고 있다. 대동 지역은 북위北魏 시대(439~534년) 전기前期의 수도로 당시는 평성平城으로 불리며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한적한 지방 도시로 비록 새 건물들을 많이 짓고 있었지만 아직도 고도의 정취는 많이 남아 있었다. 대동에서 운강석굴로 가는 도중에 석탄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탄가루를 흩날리며 수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석굴에 도착해 보니 건너편에 큰 탄광이 보였다. 안내원은 석탄 매장량이 중국에서도 몇 위 안에 드는 아주 큰 석탄 생산지라고 했다. 석굴은 날리는 탄가루로 어느새 거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안내원에게 석굴의 훼손이 더 심해지기 전에 탄광을 옮기든지 석굴을 옮기든지 해야겠다고 말하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석탄을 운반하는 트럭들이 바로 석굴 앞을 지나고 있어 그 진동으로 석굴 전체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도 큰 문제라고 했다.
운강석굴은 사암砂岩으로 이루어진 높이 30미터 정도의 무주산武州山의 앞면을 깎아 절벽을 만들고 이곳에 동굴을 파서 만든 것이다. 전체 길이는 3킬로 정도이나 중요한 석굴은 약 1킬로 사이에 밀집되어 있다. 그 사이에는 작은 두 개의 계곡이 있어 동쪽부터 동방군(제1굴-제4굴), 중앙군(제5굴- 제13굴, 제5, 6, 7굴은 목조의 누각이 남아있음), 서방군(제14굴-제42굴)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석굴들은 약 34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담요曇曜 5굴로 불리는 제16굴에서 제20굴까지가 초기(460~465년)에 이루어진 것이고, 제5, 6굴 등의 중앙굴은 최성기(477~494년)에, 제21굴 이하의 작은 규모의 석굴 등은 도읍이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운강석굴은 북위 시대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루진 것으로 석굴 사원의 중국적인 출발이며, 이후 다른 석굴 사원과 불상 조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북위는 북방 이민족에 의해 건립된 나라로 439년경에는 북부 중국일대를 통일한다. 통일 초기에 이들은 불교를 통해서 한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나 440년경 태무제太武帝는 도교의 도사의 말을 듣고 모든 불상과 불경 등을 태우고 승려들을 탄압하는 대대적인 폐불 정책을 단행하였다. 문성제(文成帝, 453년경) 때에 이르러 다시 불교를 장려하면서 460년 담요曇曜 스님의 요청으로 폐불에 대한 참회의 마음과 북위를 일으킨 선대 제왕들의 복업을 닦는다는 발원에 의해 운강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담요 5굴로 불리는 제16굴부터 제20굴까지는 각 굴의 바닥은 타원형의 평면에 벽면과 천장의 구조는 고려하지 않고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본존상을 중심으로 굴이 조영되어 있다. 또한 명창明窓이나 입구도 없으며, 천장에 조각이나 장엄도 하지 않고 있다. 불상들은 신체를 드러내는 얇은 대의나 옷주름, 밝고 사실감 넘치는 얼굴 표현들을 볼 때 인도 간다라와 중앙 아시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제20굴의 본존상은 운강석굴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우리가 늘 사진으로 대하기에 상호 등이 매우 친숙한데 실제로 보면 8.95미터가 넘는 거상임에도 불구하고 전제적으로 균형도 잘 잡혀 있어 아주 깔끔하고 지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쉽게도 이 굴의 입구는 무너져버려 본존의 무릎 이하는 훼손되었으며 시커먼 탄가루가 전신에 앉아 그 폐해는 심각했다. 제18굴 북벽 동측의 십대제자상들은 비록 하반신은 마멸되어 버렸으나 모두 벽면에 깊게 부조되어 상반신 특히 얼굴의 표정은 가히 일품이다. 법열로 가득한 미소는 수행으로 수척해진 얼굴 윤곽선과 대비되어 보는 이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
한편 중앙굴들은 시기적으로 담요 5굴보다 늦고, 굴의 형식이나 불상의 양식에 있어서도 많이 다르다. 대불의 표현을 중심으로 한 담요 5굴과는 달리 이곳은 건축적인 형식을 중시하고 있다. 전실과 후실의 구조로 벽면은 층을 나누어 거기에 본생담本生譚의 부조와 부처님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불상의 양식도 변화가 보이는데 옷은 두꺼워져 신체의 기복은 거의 없고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은 그렇지 않아 조금 어색하다. 그러나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어 당초문양이나 연꽃문양과 더불어 중국 고유의 모티브인 두 마리의 용이나 수목, 신비한 새 등의 장식들도 보인다.
동행하신 선생님들과 좋은 안내원 덕분에 조성 시기가 다른 굴들의 전체적인 양식의 비교와 함께 각 굴들에 새겨져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작은 창을 뚫어 그 사이로 흙을 날라 내면서 그 거대한 공간을 파들어 가며, 빼곡히 부처님과 부처님을 위한 장엄으로 가득 채운 그 현장에 서면 이는 국가 사업, 예술 작품 등이라는 말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을 향한 신심과 서원이 없었다면 결코 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후대에 찾아가는 우리는 어떠한가. 아마 우리도 이러한 신심과 서원이 없다면 과연 얼마나 보고 느낄 수 있겠는가. 점심시간도 아끼며 날이 저물도록 석굴에 머물러도 돌아오는 버스에 오를 때의 아쉬움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석굴 위의 산에서 아이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다. 저 아이들의 마음은 또 어떤 마음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