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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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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정운영 1995년 04월 158호
때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성경 다음으로 헌금 봉투를 지니듯, 모처럼 절에라도 가려면 반드시 지갑을 챙겨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 두 번, 보통은 세번 그 지갑을 열어야 부처님 얼굴을 뵈올 수 있다. 맨 먼저 절 근처의 주차장에서 돈을 내야 한다. 명색이 주차장인데 팻말 하나 없고 말뚝 한 개 박히지 않았다. 그 자리가 국유지라면 의당 관인이 찍힌 영수증을 발급하고, 사찰 토지라도 종단 명의의 영수증을 교부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증서 하나 없이 요령 부득의 완장을 찬 사라들이 주차료만 걷어간다. 한번쯤 그들의 신분을 캐고 요금 징수의 근거를 따지고도 싶었지만 주차료 시비로 산문을 어지럽히는 일이 불경스러워 그냥 넘기곤 한다.
다음은 절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야한다. 그 돈 또한 기분이 찜찜한 것이 사실이다. 명산 대찰의 경우 흔히 문화재를 겸하므로 고적 보호의 차원에서 정부가 징수하는 것인지 , 또는 살림 비용을 보태기 위해 해당 사찰이 자의로 부과하는 것인지 용도가 분명하지 않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통행료를 내듯 절을 참배하는 사람도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나, 그런 대비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고속도로의 경우 통행료가 없으면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있지만, 절에 들어갈 입장료가 없다고 해서 다른 부처를 대신 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을 뵙는 일에 ‘수익자 부담‘ 의 원칙을 농하다니, 정말 무엄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마지막 의식은 흔히 대웅전의 본존 앞에서 치러진다. 이방의 두 관문에서 당한 강제 납부와는 달리 여기에서의 시주는 그야말로 자유인데, 그것이 또한 온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주차장이나 매표소에 낸 돈은 모두 곁다리이고, 지금 바치는 이 재물이야말로 유사시(?)에 효험을 발휘할 ‘진짜’ 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절을 했으면 절 값을 드리는 것이 도리이고, 더욱이 부처님이야 어찌 여기시든 돈 이외에 달리 드릴만한 재물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지갑을 꺼내기 마련인데, 혹시 불전함 곁에 누가 장부라도 펴놓고 있으면 그대로 돌아서기가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 부처의 어진 숨결과 중생들의 비원이 일일이 밴 천 년 도량의 기둥과 서까래에 굵다란 쇠못을 때려 박고 전기줄 따위를 설렁설렁 늘어놓은 흉칙한 광경을 보노라면, 억장이 무너지는 분노가 치밀어 얼른 자리를 뜨고만다. 그리고 요사채 앞에 스님의 소유로 보이는 시커먼 ‘그랜저ꡑ라도 한대 놓여 있으면 그 날 기분은 완전히 잡치고 만다.
이제 나의 ‘정체’ 를 밝혀야 할 것 같다. 나는 명색이 가톨릭 신자이다. 따라서 이런 잡담은 자칫 다른종교를 헐뜯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나의 본심은 그와 정반대이다. 대웅전 불상에 합장하는 나를 보고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다가는 나중에 어느쪽에서도 안받아요“ 하고 픽 웃지만, 나는 ”천만에, 절에서 기도했다고 고개 돌릴 예수님이 아니야 그건 부처님도 마찬가지이고“ 하며 양양하게 되받는다.
사실이 그럴 것 같다. 이승의 삶을 마치고 어디엔가 다다르면, 이마도 두 분이 심판대에 마주 앉아서 “이 사람은 생전에 모니 형님께 의지했으니 형님이 받으시지요“라거나 “사람은 평생에스도 아우님과 가까웠으니 아우님이 데려가지ꡓ라고 호적을 정리함으써 ‘이중국적ꡑ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세상을 성실히 살다간 영혼에게 극락이 문을 닫고, 천당이 막을 내려 ‘무국적으로’ 황천을 떠돌게 하실 리도 만무하다. 부처니 예수니 하며 편을 가르는 것은 사람의 호사 취미일 뿐, 정작 그 분들의 경지에서는 그런 구분이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짐작이다.
이런 얘기는 나의 전공 분야가 아니다. 그러니 앞서 꺼낸 경제 문제로 돌아가겠다. 나는 불교가 다른 어떤 신앙보다도 자본주의와의 교섭이 더디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무소유 교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전혀 자극이 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력 또한 절제 위주의 불교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현대 문명은 소유욕의 집요한 자극과 격려 위에 전개되기 때문에 그것을 통제하는 수단은 자본주의와의 타협이 아닌 비타협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불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충돌’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데, 요즘 자꾸 그런 기대가 깨지고 있다.
주차료를 걷고 입장료를 받는 일은 자본주의가 침투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나의 흥분은 상당히 과장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한 조직의 운영 원리가 이윤 동기에 지배 될 때, 그것이 곧 자본주의이다. 돈이 없으면 부처님께조차 다가갈 수 없느냐는 정직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입장료 수입 때문에 유료 통행을 시행한다면, 거기에는 이미 이윤 동기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세파에 지친 중생의 고뇌와 호소를 너른 가슴으로 들어주려는 부처의 뜻에도 어긋난다. 절과 돈이라는 사뭇 ‘가연성’의 주제를 앞에 놓고 기껏 입장료 따위에 곁가닥을 붙든 채 삼천포로 빠지는(?) 나의 상상력이 내가 보기에도 너무 빈곤한 것 같다. 신앙이 본디 영혼의 구제에서 비롯되고, 현세에서의 행복과 평화의 노력조차 내세의 구원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마땅히 비타협의 요소로 무장해야 한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더라도 식민지유대에서 불붙은 민족 해방 투쟁이 본국 로마를 점령할 때까지의 저항이기에 예수의 가르침이 가장 순수하게 나타났다. 부자가 웬만큼 양심 관리를 하지 않고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지나는 것만큼이나 천당 가기가 어렵다는 복음이 이 때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 뒤 중세기에 정권과 야합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시 금력과 결탁함으로서, 교회는 날로 번성했지만 신앙은 점점 타락했다. 부자는 이제 낙타 대신 캐딜락을 타고 천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칼뱅은 재물에 많은 것은 이 세상에서 이미 내세의 구원을 약속받은 징표라는 ‘예정설’을 설교함으로써 천당과 부자,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에 놓인 모든 꺼림칙한 장애를 제거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제 천당조차 멀어진 것이다.
이런 염치없는 주장이 혹시 불교 쪽에서도 나오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이 문명과 제도는 분명히 부처님이 펴려는 법에 어긋난다. 그래서 싸워야 하는데, 돈으로 싸워서는 자본을 당하지 못한다. 어떤 교리도 처세의 방법에서 자본주의의 지혜를 따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자꾸 돈의 힘 을 빌려서 돈을 이루려고 한다. 불사를 일으키고, 대학을 세우고, 신문을 만들고, 방송을 거느리고, 병원을 짓고…. 거기엔 모두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길을 앞서 개척한 기독교조차 내 생각에는 별로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성경을 파는 서점이 늘어난다고 예수의 말씀이 널리 퍼지는 것은 아니다. 조직에는 조직 유지의 생리가 있다. 종교가 신문이나 방송을 거느리려면 종교가 맞서야 할 권력과 광고주와 손잡아야 할 때가 많다. 그것은 수단을 살리기 위해 목적을 죽이는 짓이다. ‘적과의 동침’이 영화 제목으로는 근사해도 포교의 자세로는 실격이다.
사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가져야 부처님의 말씀을 더 잘 펴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먹물들인 장삼에 바리때 한 벌로 의연히 맞서서 척박한 대지에 부처
의 설법을 도도히 전할 때, 차라리 그것이 본연의 길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