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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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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진미카엘 2003년 05월 255호
“따르릉”
참으로 오래간만에 전화를 주셔서 하시는 스님의 말씀.
“맨날 우리끼리만 쓰는데, 사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산벚꽃 앞산에 흐드러지게 피고 성당 정원의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좋은 계절에 이 웬 날벼락!
그렇다고 어렵게 하신 부탁에 선뜻 거절하지 못하고 미적거린 내 탓에 혼자 끙끙거리다가 이제야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머리 속으로는 벌써 열 편의 영화는 찍었지만 그게 글로는 잘 옮겨지질 않는군요.
이런 부탁을 받으리라고는 아마 전생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며, 베일로 가리고 있는 머리이지만,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어도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에…….
근데, 그게 현실로 코앞에 있으며 건너야 할 강이라니.
어차피 맞을 매 먼저 맞는다고 겸손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가긴 하는데….

스님!
제가 스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온 지가 벌써 3년이 되는군요.
그해 겨울 실상사에서 많은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모두가 한결같이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이었습니다. 늘 그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모습을 반추해 보곤 합니다. 3년간 모두들 많이 변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소유하며 모으기보다는 늘 주어진 것으로,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에 맞추어서 살아가시는 모습들이 지리산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함께 신선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찻상도 장만하지 않으시고 버려진 마루판자를 주워다가 바퀴를 달아서 사용하시는 모습이나, 출입문 열쇠고리가 쇠로 되어 있어 보기가 좋지 않다고 하여 흰 창호지를 이용하여 종이상자를 만들어 고리를 덮어 씌운 후 사용하고 계신 모습이나, 아침 예불시간에 열심히 세면하고 일찍 간다고 법당에 들어갔는데 더 일찍 오셔서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 계시는 모습들을 뵈면서 단순하고 검소하게, 또한 소박하게 살지만 철저한 수행자로 사시는 모습에 방법적으로 조금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수행자로서 배울 게 많이 있었음이 기억납니다.
저희들도 거의 3년마다(똑같은 것은 아님) 소임 이동을 하게 되는데 이동하면서 짐을 정리하다보면 언제 또 이렇게 많이 모았나 하고 놀랍니다.
이동 때마다 짐을 줄여야지, 줄여야지 하면서 버릴 것 버리며, 부족함에 만족하며 살아야겠다 하며 정리해서 갖고 가지만, 가서 살다보면 또 이것저것 하나 하나 모아져서 또 짐이 늘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스님!
요즈음에는 자꾸 첫 마음이란 단어가 많이 생각납니다.
제가 처음 수도생활을 하려고 입회했을 때의 그 순수했던 마음을 지금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늘어가는 주름과 흰머리는 어느덧 이 생활을 한 지 시간이 꽤 흘렀음을 말해주며 스스로 느끼기에도 변한 것이 많이 있음을 보면 저도 모르게 타성에 젖은 생활에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때로는 처절하게 묻고, 고민하고, 아파하고, 엎어져 일어나지도 못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평화로움과 샘솟는 기쁨에 행복해 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기에 어느 한쪽으로 힘듦만이 있었던 적은 없었고, 어느 한쪽으로 행복한 것만도 아니었으며, 또한 세상을 떠나서 산다 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도 세상을 버리지 못한 적도 있었고, 헌신한다 하면서도 제 자신을 위해 헌신할 뿐일 때가 많았습니다.
스님!
시간의 흐름으로 쌓여진 타성 때문에 이 첫 마음으로 돌아가기가 힘들 때도 있겠지만, 매일 매순간이 첫 마음이 아니라면 수도생활은 수도생활의 목적과는 다른 자기를 보호하는 벽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물음을 던져 보기도 합니다.
스님!
제 책상 유리받침 밑에는(언제 호 인지는 모르는) <월간해인> 표지로 나온 ‘하심下心’이란 그림을 넣어 놓고 늘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오려 놓았던 것인데 그렇게 <월간해인>과의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 사진이 왜 그리도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늘 저에게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주곤 합니다.
스님!
얼마 남지 않은 부처님오신날.
믿는 모든 이들이 자비와 사랑으로 날마다 거듭나길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에서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세상을 비추는 살아 있는 부처로서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 안에서, 희망을 말하고 행하는 나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좋은 날 되시고, 내내 행복하시길.
연둣빛 푸르름이 짙어가는 봄날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