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포 강나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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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원철
2003년 05월 255호
십오륙년 전에 인근 고령의 개경포開經浦를 처음 찾았다. 그때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고려대장경의 이운경로를 찾아가는 답사팀의 마지막 일정에 뒤늦게 낀 까닭이다. ‘팔만대장경(經)을 싣고와서 풀어내린(開) 포구(浦)’라는 뜻을 가졌으니 성지聖地로서 뭔가 상징적 의미와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곳일 거라는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저 흔하디흔한 모래톱에 별로 깊지 않은 강물이 흘러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강촌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루터 기능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외지에서 몰려온 무리들을 경계심 반 호기심 반의 눈으로 쳐다보던 동네 사람들까지 합류하여 제법 많은 인파가 함께 백사장을 누볐다. 답사 도중 지역민의 이야기는 의외의 재밋거리를 더해주었다.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그때 배를 끌고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환갑 줄에 든 동네어른이 눈에 띄었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팔만대장경에 대하여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가 있으면 아는 대로 몇 말씀 해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의외로 선선하게 열심히, 마치 이 자리에서 그 당시를 목격하신 것처럼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은 이렇게 강이 얕아졌지만 그때는 매우 깊어 근처에서는 알아주는 포구였습니다. 수십대의 배가 엄청나게 많은 경판을 나누어 싣고 와 몇날 며칠 동안 내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해인사까지 옮기는 이운행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대충 이런 줄거리의 설명이 끝나자 누군가가 뒤이어 질문을 했다.
“혹시 배가 상류 쪽에서 내려왔는지 하류 쪽에서 올라왔는지 선대의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 하류 쪽에서 올라왔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구전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장경은 강화도에서 바다를 통하여 부산 쪽을 거쳐 낙동강을 따라 이곳으로 온 해로설海路說을 뒷받침하게 된다. ‘한강 출발’과 ‘개경포 도착’이라는 기록밖에 없어 중간이동과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의문 하나가 풀리는 셈이 되겠지만, 육백년도 더 지난 일이라 한 지역민의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보류해 두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것이 답사팀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리고 답사팀은 육로설에 의거하여 남한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와 문경새재를 넘어 상주 쪽 낙동강을 따라 이곳으로 내려온 까닭이다.
그 뒤 이 자리에는 조그마한 기념표석을 세워 문화성지임을 기록해 두었다. 그 인연이 발아하여 지금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좋은 계절에 합천·고령지역의 ‘팔만대장경 축제’로 승화되어 그 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문화행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올해의 예비축제는 내년부터 정식 국가축제로 지정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와 해인사에서 모든 역량을 모았던 시간들이었다. ‘국가 지정 축제’라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