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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오히려 충만감을 더해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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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야기 그림이야기 - 설곡 2003년 05월 255호
바창무시 육시도/남송 60년대 중·후반 해인사에서 성철 큰스님을 시봉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야당 당수로서 대통령에 출마했던 분이기도 했던 전진한 선생이 큰스님을 뵈러 왔다. 그 분은 《금강경》 독송을 오래 했고 《금강경》에 일가견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분이다.
그 당시 큰스님께서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나이나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삼천 배를 시키셨는데 전진한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전진한 선생은 그 당시 이미 70이 넘은 나이였는데 삼천 배를 고스란히 마쳤다. 방장실에 들어와 큰스님에게 예를 드리고 긴장된 가운데 법 문답을 하시는 것이었다. 시중드는 나로서는 옆에서 뵙기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밸 정도로 흥분되었다.
“어떤 것이 부처의 본뜻입니까?”
“부처라는 고정관념을 가지지 말고 물어 보아라.”
전진한 선생은 머뭇거리고 말이 없었다.
그때 큰스님께서는 양 손으로 허공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셨다.
“이 뜻을 아느냐?”
전진한 선생은 한 손으로 ‘Х’ 표시를 했다.
그리고 두 분은 무엇인가 서로 언성을 높여 말씀을 나누셨지만 어렸던 나로서는 무슨 내용으로 말씀들을 하셨는지 그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두 분의 대화는 극히 짧은 시간에 끝났다. 큰스님께서는 웃으시며 나에게 명하시어 차를 대접하라고 하셨다. 그때 두 분이 만나시는 모습은 간단명료한 대화와 행동으로 깊은 깨달음의 세계를 남김없이 표현하셨고 또한 그것을 이해하신 것으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70이 넘은 노인이 삼천 배를 할 수 있는 것은 선사를 믿는 신심이 있기에 가능함이요, ‘부처라는 고정관념을 갖지 말고 물어 보아라’ 하심은 선사가 질문자의 경계를 이미 간파하시고 그의 집착을 단번에 무너뜨린 지혜이다. 이런 것이 살아 있는 선의 법문이리라.
선의 표현은 간단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이다. 그러면서도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을 핵심적으로 찔러 표현해야 한다. 억지로 옛 선사를 모방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아야 한다. 한마디 할喝이나 일격의 방棒에 우주와 삼라만상의 깊은 의미를 완전히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할과 방은 미치광이의 폭언폭행에 지나지 않는다.

선의 그림
선화란 무엇인가? 그림 그 자체가 바로 선이어야 한다. 중국의 남송시대에는 많은 선화들이 창작되었다. 그 가운데 일본 동경 대덕사大德寺에 소장되어 있는 바창무시(法常牧谿)의 육시도六枾圖는 중국 선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그림은 높이 31.1cm, 폭 29c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작품이지만 선기禪氣와 격조가 더할 수 없이 높은 걸작이다.
이 그림은 수묵으로 여섯 개의 감을 그린 것이다. 단지 여섯 개의 감이지만 먹색의 농담이 서로 다르고 모양이 같지 않다. 그 배치가 교묘하게 이루어져 안정감과 신비감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여섯 개의 감을 그린 것을 두고 육바라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바창무시 이후 최근세에 이르도록 중국화가들은 줄곳 감을 즐겨 그리고 있다. 중국어의 감이라는 ‘시枾’자字가 인간 ‘세世’, 베풀 ‘시施’ 등과 발음이 같은 것을 가지고 근세의 어떤 작가는 감 세 개를 그리고 “나는 감 세 개를 아는 사람이다(我知三世者也).”라고 하고는 삼시三枾를 삼세三世로 씀으로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아는 사람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을 구사하기도 한다.
회화작품에는 크게 그린 그림도 작게 느껴지는 작품이 있고, 실제로 작은 공간에 그렸지만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또 화면 가득 빈틈없이 무엇을 그려서 표현했지만 허전한 그림이 있고, 화면을 텅 비게 여백을 주고서도 가득 찬 느낌을 주는 작품이 있다. 이 육시도는 비록 규모가 작은 소품이지만 절대로 작은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대작이며, 작품 상단을 텅 비게 처리하여 화면의 삼분의 이 이상을 여백으로 남겨두고 있지만 오히려 충만감을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독특하고 성공한 선화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단조롭고 간단한 구도이지만 그 배치가 오묘하다는데 있다. 단조로운 가운데 풍부한 변화가 넘치는 것이 바창무시의 회화적 천재성과 선禪을 그림으로 적용시킨 용심用心과 그의 정신세계를 알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중국명화감상中國名畵感賞>을 쓴 리린찬(李霖燦) 선생은 이 그림을 중국의 명화 중의 명화로 꼽고 있다. 그는 이 그림을 보고 “먹색의 농담濃淡, 화면상에서 느낄 수 있는 기분氣分, 그 배열과 자태 등 모든 면에서 작가의 깊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그 표현이 매우 자연스러워 어떤 한 점도 억지를 느낄 수 없다”라고 했다. 리린찬 선생은 “명화는 화가가 단지 손 가는 대로 붓을 휘두르고, 천연스럽고 담박한 음률과 흥취에 따라 자연스레 이루어진 그림이어야 한다. 문장 또한 본래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을 일품이라 하고, 머리를 쥐어짜서 억지로 이루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림을 그릴 때 발현되는 신묘한 수법 또한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에서 얻은 작품을 명화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바창무시의 육시도야말로 바로 이러한 명화의 조건을 모두 갖춘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여섯 개의 감을 배열함에 가운데 감이 제일 크고 먹색도 제일 진하게 했다. 그리고 차례로 양쪽을 향해 먹색이 점점 여리게 퍼져 나가고 있다. 일렬 가로로 배열했지만 변화 있는 먹색과 구도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흥취興趣가 일게 한다. 그가 이 여섯 개의 감(六枾)으로 육바라밀을 상징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본다면 더욱 의미심장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