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치 이어져 있는 한 줄의 실을 맞잡고 이쪽을 당기면 저쪽이 딸려오듯, 세상의 삼라만상은 이렇게 실타래와 같이 이어져 서로에게 인因이 된다. 빗물은 강물의 원천이며, 또한 강물은 비를 내리게 하는 인연이고, 그 비는 마른 대지를 적셔 만물을 소생케 하는 또 다른 인연을 지으니 어찌 빗물 한 방울, 풀잎 하나가 세상에 나온 결과를 두고 이쪽에서 잡고 있던 실 하나로만 판단할 것인가.
세상 미물의 흔적에도 수많은 인연이 얽히어 있을진대, 성인聖人의 오고감이야 스스로의 인연에 더해 중생의 고통과 바램 또한 인연이 되지 않았을까.
그 날 룸비니 동산에는 뭇새가 지저귀며 무우수無憂樹 꽃이 활짝 피어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산기를 느끼고는 모든 걱정을 여의는 그 나뭇가지를 잡고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싯다르타였다. 이름난 선인들이 태자의 장래를 보고는 모두 한목소리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혹은 세상의 중생들을 위해 진리를 알릴 부처님이 될 것을 말하였다. 이미 룸비니에서 아기 부처님은 진리를 위해, 모든 유정물有情物들을 위해 세상에 왔다고 선언하였으니 이 말이 곧 현실로 이루어짐이다.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탄생과 더불어 그 열반까지의 자취를 더듬어 그중 여덟 가지의 장면을 도설하여 전하는 불교의 그림이다. 팔상도의 연원이야 이미 석가모니의 열반 후 그 진신사리를 모시던 인도의 스투파(탑)에서부터 찾을 수 있으니 삼계의 스승인 석가 부처님의 생애가 그 그림을 통해 세상의 미혹한 중생과 인연이 되었음이라. 그 중 두 번째의 장면에 비람강생毘藍降生의 모습을 전하여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고 해산하는 마야 부인의 모습과 일곱 걸음을 걷고 세상에 진리와 유정물들을 위해 왔다고 선언하는 아기 부처님이 조목조목 표현되어 있다. 강탄한 부처님을 아홉의 용이 마련한 연못에 씻기는 모습과 그 분이 앞으로 전할 진리를 미처 듣지 못하고 가야 하는 아시타 선인의 눈물까지도 한 화폭에 담겨 있으니 비람강생상의 모습이 이루어지고 전해지는 광경에 중생의 염원인들 어찌 담겨 있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세상과 인연因緣함은 그 스스로를 위함이 아니라 삼계에 펼쳐 있는 모든 어두움을 인연하여 왔음을 반추해 볼 일이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변함이 없다는 진리마저 퇴색되어 보이는 이 시절에 마치 나무의 푸른 싹을 볼 때와 새벽 어둠을 가르고 태양을 맞이하는 작은 감동만큼만이라도 아기 부처님의 그 일곱 발걸음이 칠흙같이 어두운 중생 마음을 두드리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