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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마당쓸기 그리고 대중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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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정관 2003년 04월 254호
이광수가 쓴 《원효대사》란 소설을 읽고 ‘이처럼 훌륭한 분이 있구나, 이렇게 살아보았으면’ 하는 초발심의 싹이 튼 것이, 아마도 열다섯 살 때쯤이었으리라. 그리고 1950년대 살기 어려웠던 때 스님들이 입고 다니는 누더기 옷이 불쌍하게 안 보이고 그리도 좋게 보일 수 가 없었다. ‘저 누더기 속에 무언가 있을 거다’란 생각이 들었고, 꼬부랑할머니들을 보면 ‘나도 저리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지곤 했다. 그리고 절에 가면 종소리 목탁소리가 그리도 좋았으니, 아마도 그러한 인연이 출가하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동산 스님께서 내 고향인 경주 범어사 포교당에 오셔서 보살계를 하실 때 법문을 들은 것이 출가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경주에서 처음 있던 보살계였는데, 분위기가 그리도 성스러웠고 신심나게 했다. 그 때 ‘저 스님 회상을 찾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군대 갔다 와서 범어사에 계신 스님을 찾아갔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 년 전, 스물한 살 때였다.
행자가 되면 보통 공양간으로 가는데, 나는 범어사 원효암에 있으면서 산감의 소임을 맡고서 행자시절을 열었다. 병든 소나무가 많아 그것을 감별하는 일의 감독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산감일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그 때 생식해 가면서 참선도 하고 경도 읽고 염불도 하며 지냈다. 관세음보살 염불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염주를 엮은 철사줄이 끊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생겼다. 원효암에 가면 원효 스님께서 앉아 공부한 15미터쯤 되는 연화대가 있다. 탁 트인 바다를 보는 재미로 시간만 나면 올라가 참선하고 염불하고 그랬다. 그날 새벽엔, 전날 저녁에 비가 와서 이끼 낀 바위에 미끄러져 그만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굴러내렸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솔밭이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운무가 잔뜩 낀 솔밭에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바지가 찢어지고 정강이에선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지혈을 시킨 다음 <반야심경>을 외워보며 자신을 점검하고 보니, 그렇게 굴렀는데도 뼈는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온몸에 멍이 들었는지, 암자로 내려가야 하는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적이 뒤에서 쫓아오는 전장이라 생각하고 겨우 몸을 움직여 언덕을 넘어 암자로 내려와 누워서 꼼짝도 못한 채 보름 정도를 앓았다. 그렇게 꼼짝 못하고 앓는 중에도 끊임없이 염불을 했는데, 꿈속에서 동자가 내려와 갈빗대를 갈아 주는 현몽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부처님의 가피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지 않았으면 운무가 잔뜩 낀 그 어두컴컴한 솔밭에서 까마귀 밥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앓고 누워 있을 때 원효암에 기도하려 와 있었던 홍련화 노보살님이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해 주었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보름 동안 대소변을 받아내며 정성을 다했고 어디서 구했는지 똥을 구해서 소주를 부어 가지고 주어서 두 번을 먹었다. 그 때 똥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그 노보살님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싶다. 행자시절엔 대중의 관심이 없기 마련이어서 마을로 내려가도 그만, 죽어도 그뿐이었던 천덕꾸러기 신세였던지라, 노보살님의 간호가 그리도 고마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후 나는 큰절에 내려와 있으면서도 노보살님이 있던 원효암으로 자주 올라가 노보살님이 잘 계신가 살펴보곤 했다. 늦은 가을 낙엽 떨어진 암자 툇마루 아래 고무신 한 켤레가 놓여 있는 것이 왠지 가슴이 저리곤 했었다. 그래서 강원에 있을 때도 암자에 머물면서 퇴락한 암자를 중수하며 노보살님을 마음으로나마 보살펴드리곤 했다.
그리고 행자도반 중에 의사출신이 있어 그의 도움도 받았다. 약을 사다가 발라 주고 붕대를 감아 주며 치료를 해 주었는데, 그는 그후 퇴속해버리고 말았다. 몇 해 전 만나보니 바짝 마르고 늙어 있었다. 고생을 많이 하며 산 모양인데, 그 때 그냥 있었더라면 하고 후회를 하고 있었다.
스무날 만에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큰절로 내려갔더니, 우리 스님께서 살아서 돌아온 것이 뜻밖이란 듯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제 살겠는가?’ 하셨다.
나의 은사스님이신 동산 노사는 정말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스님께선 늘, 신심을 샘물에 비유했다. 퍼 써도 퍼 써도 올라오는 샘물처럼 신심도 그렇게 올라와야 한다는 말씀을 항상 하셨다. 우리 스님은 정말 그런 신심을 지닌 분이셨다. 언제나 대중 보다 15분 정도 일찍 예불에 나오셔서 조왕단을 시작으로 선방, 관음전, 미륵전, 비로전, 탑,산신각, 독성전, 팔상전 등을 참배하셨는데, 사시기도 때 한 번, 저녁예불 때 또 한 번 그렇게 하루 세 번, 평생을 거르지 않고 예배를 하신 분이다. 나는 스님께서 지극한 공경심으로 예배하는 것을 보며, ‘정말 발원을 안들어 주고는 못 배기겠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무정물인 돌이라도 그냥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정성스럽고 간절한 모습이었다. 관세음보살의 후신이 태어난 것이라고 그 때나 지금이나 생각하고 있다.
출가자에겐 신심이 생명이다. 그것이 없으면 실패다. 신심이 있어야 내면의 활기가 유지되고 그것이 유지되어야, 거기서 쾌적함도 나오고 감미로운 표정도 나오고 진실도 나오고 정성도, 환희도 나오는 것이다. 그 옛날 나의 스님께서 신심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또 강조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누가 와서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길래, 딱 하마디로 ‘ 신信’이라고 그랬다. 출가자는 ‘초발심이 바로 정각正覺’이듯, 초발심 때의 신심을 견지하지 못하면 실패작이 될 수밖에 없다. 도를 깨치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출가의 길에 있어 신심을 견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자시절, 신심을 돈독히 함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나는 저, 행자시절 나의 스님에게서 신심을 보고 배웠다. 지금 때로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려고 할 때는 나의 스님의 그 지극 정성스러웠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또 나의 스님은 돌아가시는 당일까지 도량 비질하는 것을 철저히 하셨다. 스님께서 앞장서시니, 오륙십 명 되는 대중이 함께 비질을 했는데, 추운 겨울, 밤새 바람이 불어 도량에 아무 것도 쓸어낼 것이 없어도 꼭 나가 비질을 하시곤 했다. 깨끗하게 쓸어진 마당 위로 내리던 적요와 청정함, 스님은 무언으로 그 무욕의 청정함을 보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혹 절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도량이 청정해야 천룡이 강림한다는 것, 몰라?’ 하시며 대중들을 나무라시곤 했다. 도량의 비질은 우리 스님의 가풍으로 남아, 지금도 나는 아침 공양하고 꼭 도량에 비질을 하고 있다. 스님은 또 대중과 함께 공양하는 것을 빼놓지 않으셨으니, 내가 스님의 지극 정성스러운 부처님에 대한 신심과 도량의 비질, 그리고 대중공양 참석은 그 시절 행자 때 모두 배운 귀한 가르침이었다.
행자생활을 한 대여섯 달 하고 나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는데, 스님께서 경환慶煥이란 이름을 주셨다. 그런데 계를 받고 나니 출가의 길을 잘 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부담이 될 수가 없었다. 그 때 언뜻 바로 보면 잘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라 우리 스님께 가서 조심스럽게 이름을 ‘정관正觀’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좀 놀라시면서 ‘그래? 그렇게 해, 그럼’ 하셨다. 그후 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게 정관이야?’ 하는 꾸중을 들었으나, 나는 바로 보면 고생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돌아보니 올바른 생각이었다. 팔정도의 첫머리에 ‘정견正見’이 오지 않던가.

요즘 나는 새벽 세시 15분 전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서 법당으로 향하며 생각하곤 한다. ‘이 길이 얼마나 행복한 길인가. 내게 이 길이 없었다면, 나는 무엇인가.’
칠십이 넘은 지금도 솟아오르는 기쁨을 멈출 수 없다. 정성스럽게 살아온 이 길이었기에 지금 나는 날마다 환희롭고 행복하다. ‘잘사는 것은 정성스럽게 사는 것’이 칠십 평생 출가의 길에서 건져올린 나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