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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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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조승기 1990년 10월 104호
깊은 밤.
써 나가는 소설의 마무리 부분이 시원치 않아, 철우는 파지만 내고 있었다. 그는 볼펜을 놓은 채 책상 아래 수북히 쌓여 있는 구겨진 원고지들을 내려다 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려니까 어디선가에서 수없이 지는 나뭇잎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였다. 나중에는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 오는 바람소리가 그의 귓전에 와 찰랑댔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리의 출처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번엔 원승이의 울음 같은 슬픈 휘파람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을이 깊어 가는 소리였다. 그걸 알아차리자 철우는 아파트의 베란다를 넘어드는 달빛과 풀벌레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서재의 창을 통하여 앞산이 바라다 보였다. 이미 가을이 산을 칭칭 감아버려서, 산은 꼼짝없이 사로잡힌 채 얼굴을 붉히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지난 여름동안 원고지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미처 계절의 변화를 들여다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의 몸이 붉게 혹은 노랗게 물들고 있을 때, 몸의 단풍을 말끔히 지워내며 일곱 살짜리 딸이 서재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빠, 평생 부탁!”
딸년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꼭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철우는 매번 표현의 귀여움에 거절을 못하는 거였다.
“뭔데 ?”
“아빠가 들어줄지 몰라.”
“말해 봐.”
“어려울 텐데.”
“지금 쉬고 있는 참이니까, 괜찮아.”
“정말?”
“그렇대두.”
여기까지는 전개가 항상 같았다. 그제서야 딸년은 요구사항을 꺼내드는 것이었다.
“종이배 하나 만들어 줘.”
“종이배 ?”
“으응 ! ”
“그래, 만들어 주마. 네 방에 가 있어라.”
“다 만들면 불러야 해.”
“알았다.”
종이째.
창문을 통해 시냇물이 흘러 들었다. 그의 몸은 적셔지기 시작했다. 장딴지부터 차오른 물이 허벅지, 엉덩이를 넘어섰다. 시냇물에 실려 떠오던 종이배 하나가 점차로 커지더니 마침내 그의 두 눈을 가득 덮어왔다. 철우는 눈을 감았다.
무더운 여름 밤.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마을 앞을 흘러가는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산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마을 사람들의 목욕터였다.
시냇물을 산 속으로 한참 타고 오르면 시냇가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십여 미터쯤 시냇물이 오른쪽으로 굽어졌다가 다시 펴지며 방향을 예전처럼 잡았다. 바위 아래까지가 남자들의 목욕터였으며, 굽어진 곳은 무인지대, 방향을 튼 곳부터 산 윗쪽으로는 여자들의 목욕터였다.
마을 앞에서 산으로 접어들면, 시내의 좌우에는 나무와 덩쿨풀들이 서로 엉겨서 무성히 자리잡고 있었다. 시내를 따라 나 있는 길을 따라가도 시냇물에서 목욕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웅얼웅얼 하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철우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땀을 씻어냈다. 그날따라 목욕하러 나온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밤인데도 바람 한 점이 없었다. 그는 조금씩 윗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바위가 바라다 보이는 지점까지 왔을 때 달이 떠올랐다. 아무도 없었다. 늘 왔던 곳인데도 약간 무서워졌다. 누군가가 올 거라는 기대로 바위 아래의 물 속에 앉아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달이 머리 위까지 왔다.
달빛은 수면에 닿아 부서지며 시냇물과 함께 아래로 흘러갔다. 달빛은 주위의 풀잎에, 또는 그의 몸위에 내려 수북히 쌓였다. 어디선가로부터 정적감이 몰려왔다. 너무 고요해 건너편 산의 어느 귀등이에서 모래 구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반짝.
시냇물에 떠서 내려오는 물체가 철우의 눈에 잡혀 왔다. 그는 무얼까 하며 보고만 있었다. 물체는 철우 쪽으로 점점 가까이 왔다. 직사각형의 물체를 그는 손으로 잡았다.
미끈.
비누였다. 상류에서 누군가가 놓친 게 분명했다. 그는 두 손으로 비누를 쥔 채 물 속에 그냥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에겐 긴 시간으로 느껴졌지만, 아마 금방이었을지도 몰랐다.
철벅철벅.
윗쪽에서 시냇물을 차며 급히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 졌다. 굽어드는 쪽에서 바위쪽으로 마악 방향을 트는 것이었다.
아아.
뜻밖에 같은 반인 순이였다. 순이는 입도, 몸도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달빛이 뭉텅 쏟아져 내려 순이를 밝혀 주었다. 순이는 어둠 속에서 켜놓은 촛불 같았다. 꼼짝 않는 순이를 향해 철우는 시냇물에서 몸을 빼내 다가가 비누를 건네주었다. 순이의 뒷모습이 달빛에서 빠져나갔다.
순이는 방학이 끝나고 교실에서 만났을 때, 철우에게 아무 말없이 곱게 접은 종이배를 하나 전해 주었다. 그는 누가 볼세라 채듯 받아 가방을 열고 책갈피에 끼웠다. 그 뒤로 종이배는 한시도 쉬지않고 철우를 따라다녔다. 그가 어디에 가든지 따라와 주었다.
종이배.

“아빠, 뭐해! 내가 들어와 불러도 모르고 말야.”
철우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의 손 끝에는 종이배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그 일이 철우가 열 살 때였으니까, 이미 이십오년 전이었다.
“그랬어 ?”
“무슨 생각했어 ?”
“아무 것도 아니다. 너, 이거 무엇할 거야?”
‘내 짝에게 주려구.”
“그애가 네게 잘 대해 준 모양이구나.”
“응, 예쁜 책받침을 주었거든.”
“그래? 그런데 이걸 만들 생각을 네가 했니 ?”
“아니, 엄마가 꼭 아빠한테 만들어 달래라구 그랬어.”
안방에서 순이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은경아, 아빠 글 쓰시게 그만 빨리 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