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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수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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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9년 02월 204호
인성人聲에 다툴 만한 악기가 없다 했다. 과연 그러하다. 안거도 중반을 향해 치달릴 때, 아직 새벽은 멀어서 산과 하늘에 경계가 생겨 나기 전, 온갖 색 다 무너뜨린 괴색壞色 옷 입은 결연한 무리들이 입 모아지어 내는 독경 소리는 무릎을 꿇고 온몸을 던져 넣듯이 듣지 않을 수 없다.

지혜의 완성자인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 실천할 때에, 오용 모두 비었음을 꿰뚫어 보고 모든 괴로움을 벗어났느니라···

땅과 하늘이 깍지라도 낀 듯이 사위는 어둠 한 가지로 완고하고, 달 없는 하늘에 얼어붙은 듯이 박힌 별들만 푸르다.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서, 뒤바뀐 생각 멀리 여의어 구경의 대열반에 들어가느니…

무명을 여의게 하려는 부처의 뜻은 자비로우나 어법은 단호하여 , 아직 길 위에서 어리대는 육신을 감싼 옷자락은 얇아서 가긍하다. 예불은 부처를 위한 의식이자, 자신을 위한 의식이기도 할 터였다. 부디 그 뜻을 헤아리소서 .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삼세제불 의지하여 깨진 진언에서 또한 의지하려 하나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나라안에서도 해인사 대중이 짓는 아침 예불 독경 소리는 그 빠른 속도 때문인가, 가야산처럼 골기가 성성하고 장엄하기로 호가 나 있다. 삼보 종찰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대중이 모여 사는 해인사이다. 올 동안거에 결제 중인 수좌는 서른명 남짓, 그러나 해제 때는 흩어질 대중이니 일백 명 학인들이 상주 대중의 근간을 이루는 셈이 된다. 이는 해에 따라 일천 명을 웃돌거나 밑도는 이 나라 전체 학인의 십분의 일에 이르는 수효이기도 하다. 강원 학인의 상한선을 지정하게도 되었다!
93년부터 강주 소임을 맡아 오고 있는 수진스님에게는 그러나 아침 예불 소리보다도, 아침 공양 전까지 학인들이 처소에서 경을 읽는 소리가 더 “음악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본업은 수행이나, 서양의 고전 음악, 명상음악 따위를 즐겨 듣는다고 명랑하게 말했다.
-그 동안 제 손을 거쳐 간 음반이나 시디, 그리고 카셋 테이프까지 치면 천 개는 넘을 것 이라 했다.-그리고는, 최근에 월운스님의 고희 기념 논총집에서, ‘발심과 선지식’이란 제목의 논문을 통해 화염경에 나타나는 선지식의 의미와 면모 따위를 진지하게 살펴보기도 했던 그가, “팬찮은 음악은 선지식으로 심을 만한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도량석에 이어 예불로 시작되는 산사의 하루가 학인에게는 스물네 시간 정신적, 육체적으로 깨어 있지 않을 수 없는 수행의 하루가 된다. 올해 결제중인 학인 수효는 예비반인 사미율의 과정반까지 합하면 105명, 그가 서른여섯살 나이로 강주로 부임한 뒤 130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세시에 시작된 예불이 백팔 참회로써 마무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제 자신을 반조해 보는 귀한 시간이다. 일곱시부터 두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수업은 삼보에 강의가 시작됨을 고하는 상강례로써 시작하니, 4년이라는 피교육 기간의 나날이, 부처의 뜻을 예경하고 그에 동참하려는 각오를 되새기는 의식이라 볼 만한 것이다. 자습과 공동 울력과 어른 스님 모시는 동의 일과는 밤 아홉시에 끝난다.
그가 50년 해인 강원(그는 내내 “승가대” 대신 “강원”이라 했다.)의 14대 강주 소임을 맡은 이후, “학적 평가서”라는 것을 만들어 학인들을 단련시켜 온다. “교육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쓰는 이 평가방법은 4년의 강원교육 기간이 학문의 연마만이 아닌, 수행의 기간이기도 해야 한다는 그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그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경율논 삼장에 대한 학업의 성취보다는, 그를 위한 노력의 태도와 준비 과정, 그리고 대중살이의 성실 여부이다.
한 해에 두 번씩, 반장과 찰중, 입승, 그리고 담당교수의 조력을 받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이 방식은 그가 믿는 바,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길을 지향하게 하는 전통 강원의 운영 취지에 맞는 것”이면서, 효과도 꽤 있어서, 지난 38회의 경우 쉰두 명 방부 학인 가운데 서른두 명이 졸업을 했다. 정화 이후 강원 최다 졸업생 수효였다고 했다. 50퍼센트를 조금 웃도는 여느 해에 비하면, 60퍼센트가 넘는 졸업생을 배출해 낸 “성공적인” 틀로서 작용한 셈이다.
연전에 제정되어 시행중인 강원의 학인 상한선은, 그 선을 훨씬 초과하는 비구니 강원이 엄존하는 것이 현실인 만큼, 그것이 ‘비구 강원령’에 머물고 있는 것이 그는 아쉽다. 상한선 제한이라는 강원령에 대해 가장 큰 부담이 되는 곳이 바로 최다 학인의 해인 강원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겨냥하는 바 학인의 전국 사찰로의 확대 효과에 대해서는 그는 부정적이다. 아니, 그럴 뿐만이 아니라, 차라리 해인 강원을 종립 강원으로 지정하여 현실화 시키는 것이 어떤가, 생각한다. 물론 강원의 교과내용은 미흡하여 보완될 필요가 있음에 그도 동의한다. 이 곳에서는 현재 경율논 삼장의 기본 교과목말고도, 여러 내용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가 비중을 더욱 크게 두고 싶은 것은 서양의 고대 및 근현대 철학과 비교 종교학이다. 서양의 것에 대한 절대 가치로서의 인식에서가 아니라, 불교의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이해를 돕는 방편으로서의 인식 때문이다.
그는 다시금 다짐하되, 강원의 교육은 경전과 조사들의 어록, 그리고 논서를 읽되, 궁극적으로는 조계종의 종지이기도 한, “자각 각타, 각행 원만한 근본 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 견성성불, 전법도생”을 하기 위한 것이다.
새 총무원장을 정점으로 종단의 행정을 이끌어 갈 소임자들도 새롭게 구성되었지만, 향후 최대의 종책 사업은 송풍을 진작시키는 교육 개혁 사업이 될 터임이 다시금 재천명되었다. 뒤집어 밀하자면, 이는 지난 개혁 종단에서 여러 논의 과정을 통하여 어렵게 정리된 것이 제대로 추진되어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된다. 세월을 다툴 내용도 그리 해결될 사안도 아니지만, 결정된 것이 다수의 의사가 집약된 것이었다면, 시행의 미비함은 아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도 종회의원으로서, 교육개혁 위원회 위원으로서 종단 활동에 참여했던 바, 그 과정에서 그가 견지한 것은, “교육 자체를 시장 경제 논리로 생각하는 현실”과,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서구 교육 형태로의 경도”에 대한 우려였다고 했다.
지난해, 명분이야 어떠했든, 절대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홍역을 치르면서 승단이나 재가는 모두 지우기 힘든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사단의 근본은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출가정신, 곧 율장 정신의 상실에서 온 것이 아닌가 여긴다. 부처와 서산 대사의 뜻이 그러했거니와, 불교 세계관의 형성은 계정혜 삼학으로 이루어지는 바,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은 계로서, 계의 그릇이 튼튼해야 거기에 선정의 물이 담기고, 그물에 지혜의 달이 비칠 터이기 때문이다.

열네 살 동진에 부산 마하사로 출가했다. 속향인 고성 옥천사 아랫마을, 내려다보인다고는 하나 앞을 가로막는 지리산과, 대처로 통하는 산모롱이 차길을 바라보면서, 그저 갑갑하여 떠날 생각만 가득했던 어린 아이가, 앉은 자리 털고 스스로 열어 보인 길이다. 큰스님 그늘 아래 머물기만 해도 수행이 되는 줄로만 알던 그 무렵에, 남의 갑절이 되는 네 해 동안의 행자 시절 보내고 스승의 곁을 떠나 범어사 강원으로 갔다. 이 강원 저 강원으로 강주 스님의 움직임이 잦았던 그 때,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뒤로도 스승을 찾아 경학에 몰두한 것이 십 년, 운성, 우룡, 보광, 운기, 탄허, 각성 등, 그가 모산 강백만 해도 열한 분이나 된다. 배우고 싶은 스승을 찾아 강원을 옮겨 다니는 통방이 사갈시되던 때이라, 그의 이런 경력도 별난 것이 된다.
그의 은사인 문성스님은 젊은 날에는 정진에만 힘쓰다가, 해방 뒤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한 뒤로 초대 감찰원장과 몇 차례 중임 끝에, 일백 세 나이로 입적하시기 스무 해 전까지, 세속의 부름에 일절 응하지 않고 노년의 삶을 정갈히 마무리한 분이었다. 당신의 은사이자 법사인 서응스님의 강講보따리는 법답法沓과 함께 유일한 전강 제자인 수진스님에게 넘겨졌다. 서응 노스님은 강한영 스님과 함께 근세 한국의 양대 강맥을 이루는 진진웅 스님의 전강 제자였다. 그가 이루는 가지의 뿌리를 짚어 보면 그렇게 된다. 강보따리란 스승이 평생을 궁구해 온 경학의 요체이고, 강보따리와 함께 전해지는 법답이란 스승이 법맥을 이을 제자에 표하는 육친의 정 같은 것이 될 터였다. 그가 오늘 강원에서 몸소 베푸는 것은 화엄경, 그런 배경의 그에게 기대할 바란, 나라 안의 유수한 강백을 스스로 찾아 다닌 끝에 성취했을 경학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것일 터였다.
문성 은사 스님은 말년에 화엄경 가운데서도 보현행원품을 사경하고 독송하는 일로써 일상을 소일하셨다. 그 또한 화엄의 바다에 즐겨 몸 적시고 사는 나날을 보낸다. 부처가 성도 뒤에 처음으로 입을 열어 자문자설로 원없이 풀어 놓은 광대하고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 ,완전 무결한 가르침이니 일승원교一乘圓敎라 불리는 화엄경, 팔만대장경을 모두 권속 경전화시키고마는 화엄경을 두고, “오래 만지작거려 가장 편한 책”이라 그는 말한다. 그리고는 80본 화엄경에 실린 게송을 번역하고, 40본 화엄을 축약하여 시로 만들고, 80본 화엄의 청량 소초를 완역하는 작업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에게 “남의 보배를 세는 일” 이상이 되지는 않을 모양이다. 영가스님이 스스로 주소를 더듬고 경론을 살펴온 일을 두고 자탄한 바, “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바닷속 모래 헤아리듯 스스로 피곤한” 일이고 말 모양이다.
기러기가 북쪽으로 돌아가고, 까치가 새끼를 품을 집을 짓기 시작한다는 소한 무렵이다. 그 속에서, 돌아가야 할 자제자리로 돌아가고, 한추위 속에서도 새로운 삶은 영락없이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 읽힌다. 속랍이 마흔둘인 그가, 아직은 제가 살아 있다 할 만한 이 때에, 마지막으로 용맹심을 일으켜 나아가고자 하는 길은 따로이 있다. 말하는 오늘의 절기는 공교하다. 전게를 받은 제자로서 은사 스님은 그에게 당선의 법을 이어받아 큰 회상을 펼쳐 줄 것을 이르셨다. 그러나 그가 당돌히 되받아친 말, 당선의 상좌 하나 마구니 만드실 터냐던 말은 아직도 유효한 모양이다.
이 곳에 오기 직전까지 구 년 세월 동안 제방 선원을 찾아 참구하였다. 책 보따리 끌고 다니며 경학에 몰두한 것이 십 년, 고타마의 뜻을 의리로나마 깨우쳐 해오解悟의 지경에 이르렀으면, 그런 뒤로는 제 스스로가 고타마가되는 것이 출가사문의 길이라야 했다. 수다한 선방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힘을 얻은 곳은 봉암사, 그는 요즘도 잠을 두세 시간을 넘게 이루는 법이 없거니와, 그 곳에서 한철을 장좌불와를 했다. 남 다자는 여름 밤, 천지 사방 분간활 수 없이 내리퍼붓는 비를 도반 삼아, 도량내 누각에서 화두를 성성히 들 수 있었던 곳이다. 시삼마. 누구로부터 타 낸 것이 아니었다. 다룬 공안과는 달리 비롯되는 이야기가 없는 “왜” 그 자체이니, 제2변으로 떨어질 리 없는 수승한 화두라 여기어 제가 스스로 택한 화두였다.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지거니와, 덜고 또 덜면 무위에 이르나 이루지 못할 바 없도다. 그는 불언지교不言之敎를 꿈꾸고 무위진인無位眞人을 꿈꾼다.
그가 홈모하는 노자는 또 이른다. 문을 내고 창을 뚫어 방을 만들되, 비어 있으니 방으로 쓸 수 있도다.
그에게 묻는다.
왜 배우고 왜 가르치십니까.
그가 답한다.
버리기 위해 배우고, 버리게 하기
위해 가르쳐요.
좁지 않은 그의 방, 한가운데를 블라인드로 갈라 접객과 사처를 겸하는 그 곳에는 책장은 있으나 책 한 권이 없고, 가사 장삼 두어 벌이 걸려 있을 따름이었다. 제철이 아니어서 써늘하기만 한 밀짚 모자 두 개와 경내 전화번호 달력뿐이었다. “용심이 나서” 벽장 속까지 열어 본다. 속옷과 양말, 거의 덮는 일이 없다는 겨울 이불 한 채, 반요로 접어 잘 때에 베게로 삼는다는 좌복 하나뿐이다.
그가 말하는 버릴 바란 이런 외물外物에 그치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처소에서 그가 맺고 있는 외물과의 관계는 일단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