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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자비·해탈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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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3년 04월 254호
나는 사계절 중에 겨울을 좋아하고 색깔은 연두색을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정말 모순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참 단순하다. 겨울은 꾸밈없는 본래면목을 보는 듯해서 좋고, 연두색은 생명의 빛깔인 것 같아서 좋다. 눈을 시원하게 하고 마음을 싱그럽게 한다. 그래서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색 옷을 입고 수행자로 살고 있다.
산다는 것은 좋아하는 기호만을 따라 살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절제하고 비우며 살아야 한다. 어쩌면 삶이란 타고난 욕망, 그 힘을 절제하기보다는 그 굴레를 따라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물이 도도한 물줄기의 힘을 거부하지 못하듯이, 거센 바람이 부유하는 먼지를 쓸어 가듯이 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을 절제하고 비우며 산다는 것은 바로 그 욕망을 부리며 사는 일일 것이다.
출가의 삶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다. 누구의 힘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선택한 삶은 자율적이어야 한다. 교단이 정한 룰이나 수행자 개개인이 지켜야 하는 계목에 있어서 자율적인 힘을 갖지 못하면 역시 출세간의 삶도 욕망의 굴레를 따르고 수행이라는 또 하나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출가의 삶을 선택하고서도 삶에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절제하고 인욕하는 삶, 하심하고 베푸는 삶이 수행의 꽃이다.
어느 날 엄마를 따라 절에 온 어린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스님! 스님은 왜 맨날 회색 옷만 입고 살아요? 우리같이 이렇게 예쁜 옷 입으면 안 돼요?”라는 질문이었다. 그날 나는 새삼 내가 입고 사는 옷의 빛깔을 생각했다. 왜 내가 잿빛 옷을 입고 살기를 자청했는가. 이 옷의 진정한 의미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진정 나에게 어울리는 옷인가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내가 산문에 들어와서 회색 옷을 받아 입던 날 어른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 옷은 인욕의 옷이고, 자비의 옷이고, 해탈의 옷이다. 인욕하면서 자비롭게 사는 법을 익히고 꼭 해탈의 문에 들도록 해라.” 살아가면서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법문이 또 있을까 싶다. “왜 맨날 회색옷을 입고 사느냐”는 어린이의 질문은 그 어른 스님의 말씀을 다시 새롭게 기억시켰다. 그래서 선지식은 처처에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 출세간에 사는 우리 스님들을 포함한 성직자들이 늘 정해진 옷을 입고 살면서 얼마나 이 옷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의 옷은 세간에 사는 사람들이 철따라 옷을 새롭게 입고 외적인 모양새를 위해서 디자인을 새롭게 하고 색깔을 고려해서 입는 옷과는 분명 다르다.
가끔은 옷에 너무 민감한 수행자들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 패션쇼를 하는 모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옷은 평상복까지도 분명 나를 수행자로 거듭나게 하는 인욕의 옷이요, 자비의 옷이다. 수행자는 잘 포장되어서 시장에 진열된 상품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러기에 겉모양을 치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옷에 자기의 욕망을 감추고 사는 삶보다는 옷의 주인으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어떤 사람들은 옷으로 자기를 많이 꾸민다. 허물까지도 감추려고 한다. 물론 간혹 유난히 화려하지도 않고 유명 디자인의 옷도 아니지만 디자인이나 색깔을 기막히게 조화롭게 차려 입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많은 말이 없어도 유쾌하고 담박해서 좋다. 유명 브랜드의 향수를 쓰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맑고 선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전할 수 없지만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스를 수 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수행자의 삶에서 배어나는 향기는 꽃향기가 아니다. 바람을 거슬러 세상을 향기롭게 할 수 있는 사랑의 향기, 평화의 향기, 치유의 향기를 성실한 수행자는 삶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화려하고 멋진 옷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성자들의 본의를 잘 알고 실천하는 수행자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언젠가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과 한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옷이 삶의 수단이 되는 옷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나는 이 옷을 벗을 생각입니다.” 지금도 그 스님은 이 옷을 부끄럽지 않게 입고 정진하고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말을 하던 스님의 단단한 수행자의 정신을 성성한 푸른 눈빛에서 엿보았었다.
그렇다. 우리는 삶의 수단으로 이 옷을 입고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옷이 지닌 의미가 곧 목적이 되는 삶이어야 한다. 분명 누군가는 이 옷을 삶의 수단으로 입고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업의 연장일 뿐이다. 혹자는 너무 옷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자가 입고 사는 옷에 대한 구속만 맛보았지, 자유를 맛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때로 이 옷은 외적인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는 든든한 움막이 되기도 하고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욕망의 갈증을 쉬게 해 주는 좋은 감로수가 되기도 한다.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절제하며 인욕하고 궁극에는 식은 재처럼 다 소멸하기까지 정진의 끈을 놓지 않는 삶이 수행자의 삶이다.
어떤 모습으로든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혈연을 떠나 모든 인연을 얻는 삶, 작은 집을 버리고 세상의 집을 얻는 삶, 개인적인 삶보다는 대중적이고 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수행자다. 혈연으로부터 심신이 완전히 떠날 때 세상의 모든 선연을 얻을 수 있고 작은 절이나 교당에 집착하지 않을 때 세상이라는 큰 도량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스님! 저는 스님처럼 수행자로 살고 싶은데 하고 싶은 일이 많고 가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냥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포기하지 못하는 그 무엇보다는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는 속뜻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웃었다. 내 웃음에 우리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는 의미를 포함하고 말이다.
그렇다. 어떤 이는 삶을 도전이라고도 생각할 것이다. 하루하루 삶의 어떤 목표를 향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도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팽팽한 긴장감이 있어 오히려 살아 있는 느낌이 생생해서 좋다고 말한다. 반면 단지 이 지구 위에서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며 가장 느린 속도로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 경쟁의 상대 하나 두지 않는 사람, 자기의 가슴 한켠을 누군가를 위해서 자리를 비워 놓은 사람, 들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와 눈 맞추며 충분히 행복할 줄 아는 사람, 빠른 것을 바라지도 않고 많은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살 줄 아는 사람들이 인간 세상에 꽃이며 향기로 피어난다. 수행자의 말없는 삶의 실천이 그런 삶을 선도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복잡한 도로에 이정표나 신호등이 없으면 금방 얽혀 버리는 자동차들처럼 현대인들의 삶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마음과 상대적인 빈곤감은 큰 화를 자초하고 있다. 가르침이나 이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누군가는 잠깐 잃어버린 삶의 이정표 때문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
인욕의 옷을 입고 자비의 행을 통해 해탈의 길을 가는 사람, 그런 수행자가 삶의 가치관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의 반듯한 길잡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