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동화사가 10년간 폐쇄됐던 강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인재양성이 곧 불교의 미래’라는 인식확산의 결과였다. 동화사 강원의 초대 강주로 초빙된 스님이 해월 스님이다. 해월 스님과 동화사의 인연은 이렇게 강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때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서 강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스님의 나이 39세(현재 43세)였으니, 여타 강주스님들의 연령과 비교할 때 획기적인 선택이었다. 이후 전국 강원의 강주스님들의 연령이 점차 낮아져 가고 있는 추세로 세대교체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30대 강주는 유일했다. 어려서부터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누구도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18살에 출가를 결심하고 통도사 산문을 들어서는 것도 그랬다. 스님은 4대독자였다. 대를 이어야 하는 귀한 자식이라는 부모들의 기대를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다. 어른 스님들은 어린 나이라 부모의 동의를 받아오라 일렀지만, 터 잡고 눌러 있는데야 대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학문과 인연이 깊었음은 분명했다. 통도사에 들어온 지 3개월 정도 지나 지금 사숙 되시는 지선 스님이 상노전 벽안 스님 시봉을 권하셨다. 노스님은 동국대 이사장을 지낸 분으로 해월 스님은 벽안 스님께 <치문>이며 <초발심자경문> <사미율의> 등을 배웠다. 그런데 노스님은 전날 배운 것을 이튿날 외우지 않으면 다음 공부를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찰은 저녁 아홉시가 지나면 불을 꺼야 하기에 못 외웠으면, 랜턴을 들고 계곡에 나가서 랜턴 불빛으로 책을 읽고 외우곤 했다. 해월 스님 역시 공부 욕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월 스님은 노스님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스님께 뺨을 맞은 기억도 잊혀지지 않는 일로 남아 있다. 어느 여름날 노스님의 심부름으로 사하촌인 신평 장에 갔다가 시간이 조금 있어 ‘잠깐만 보고 가야지’하고는 만화에 빠져 점심공양시간을 넘겨버렸다. 누군가 가져다 드렸겠지 싶어 신나게 만화 보고 저녁공양 무렵에 돌아오니 노스님께서 문 앞에 앉아 계셨다.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셨는데 속일 수 없어 ‘만화 보고 왔다’고 말씀 드렸더니 뺨을 때리시더란다. 무척 점잖은 분이셨는데, 심부름 간 아이가 오지 않자 걱정을 많이 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따끔한 손길이 지금은 따스한 온기 되어 가슴을 적신다.
노스님과 함께 해월 스님에게 또 한 분의 애틋한 스님이 있으니 은사이신 종범 스님(현재 중앙승가대 총장)을 향한 마음은 단순한 기억이나 정리를 넘어 거의 삶의 표상이자 지침이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해월 스님이 종범 스님의 상좌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봐도 스님의 고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종범 스님은 벽안 노스님 상좌로 포교사이기에 어딜 갔다 오시면 꼭 노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셨다. 해월 스님은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늘 그 모습을 대할 수 있었는데 어찌나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지 옆에 있는 사람까지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해월 스님은 계를 받을 시기가 되자 서슴없이 종범 스님을 은사로 모시겠다고 결정하고 스님을 찾아갔는데 종범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당시 종범 스님은 30대 초반이었는데, “나는 아직 젊고 수행이 부족하며 벌써 두 명의 상좌가 있으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월 스님은 계속 허락을 청했고 종범 스님은 그저 책만 볼 뿐이었다.
“나는 지금도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이 있는데, 그 때 무릎 꿇고 3시간을 앉아 있었어요. 스님께서도 그렇게 3시간을 책만 보시더니 경반 스님들을 불러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데려가라’ 이르시더군요. 끌어내려 하자 나는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었어요. 한번 태어나서 자기 뜻을 관철 못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요. 끌어내다 입에서 피가 나오니까 스님들이 놓고 나가더라구요.”
경반 스님들이 나가자 종범 스님은 병원을 갔다오면 허락하겠다고 하여 병원을 다녀오자 스님 하시는 말씀이 “자비와 지혜를 배우는 사람이 너무 고집과 아집이 심하니 6개월 행자를 더 하라”셨다. 해월 스님은 기뻐하며 6개월간 행자생활을 더 했단다. 해월 스님은 출가할 때나 지금이나 은사스님을 무척 좋아했다. 그 때는 멀리서 스님 얼굴만 뵈도 가슴이 떨렸고, 스님 신발 닦아놓고 먼지 앉을까봐 신문지 덮어놓기도 하고, 겨울에 신발 따뜻하게 하려고 아궁이 안에 넣었다가 다 태워먹기도 하였다. 그런데 출가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해월 스님은 은사스님께 전화나 편지를 함부로 하지 못하며, 앞에 가면 음성을 더듬고 조리가 없어지면서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고 고백한다. 삶의 전형이자 존경하는 스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님은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어른 스님들을 통해 출가수행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신앙과 품행 등을 익혔다면, 현실인식은 해인사가 가르쳐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스님은 해인사와 인연이 깊다. 해인사 강원을 졸업하였고, 당시 도반들과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남을 갖고 있다. 해인사가 현실참여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80년대 중반 해월 스님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였고 새로운 흐름들을 빠르게 흡수했었다. 한동안은 경전 대신 사회과학 서적이 방 안에 가득했다. 법연 스님, 현응 스님, 종림 스님 등 <월간해인>을 중심으로 진보적 의식을 가진 스님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현재 직지사 박물관장이신 흥선 스님께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해인사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은데, 해인사 마저 어느 순간부터 문중중심으로 흘러가는 듯해 답답하고 예전 같은 패기가 사라졌다며 아쉬움을 표한다.
강원 졸업 후에는 차장사를 한 적도 있다. 이제 신도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시대는 지났다는 결론에 이르자 스스로 노동을 해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녹차를 만들어 팔았다. 지리산 천은사에 가서 녹차 만드는 법을 배웠고, 속가 부친에게 부탁해서 전라도 보성에 3천평 정도 되는 땅을 사서 차재배를 했다.
80년대 초반이니까 당시만 해도 차 만지는 이가 거의 없었다. 대흥사 일지암 여연 스님이 거의 유일했다. 해월 스님은 ‘만차晩茶’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차장사를 했는데, 어느 날 승려와 장사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학문과 차를 바꾼 것이다.
차밭을 정리한 돈으로 장학금 삼아 유학을 떠나 일본 동붕同朋대학에서 4년, 영국 리치먼드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다시 인도에서 1년 반 정도를 만행하다 6년 전 한국에 들어왔고 4년 전에 동화사로 오게 된 것이다.
스님은 정체를 거부한다. 그것은 신선하고 맑은 물의 공급과 흐름을 멈추게 하는지라 고여서 썩어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동화사 강원이 열린 강원을 표방하는 것은 이런 스님의 의식의 소산으로 보인다. 해월 스님은 동화사 강원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불교계 최초의 열린 강원’이라고 말한다. 세간 교육의 방향 역시 열린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시점이지만 어쩐지 열린 강원이라는 표현이 생소하다. 도대체 열린 강원은 어떤 강원을 말하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열린 교육을 개별성과 자율성, 다양성을 추구하는 교육이라 한다면, 해월 스님이 말하는 열린 강원은 ‘삼보 신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실천적, 미래지향적 종교교육’이라 정의한다. 일단 삼보 신앙에 대한 철저한 체득을 강조해, 강주스님을 포함한 전 대중이 참여하는 철야정진기도가 매달 대불전에서 거행된다. 또한 실천을 중시해 전통 강원의 교과과목을 계승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승가상 정립을 위해 사미과(1학년), 사집과(2학년)의 2년 동안에는 봉사활동을 통해서 불교도들의 사회참여와 보살정신을 몸소 익히며 실천토록 권장하고, 사교과(3학년) 대교과(4학년) 때는 포교에 중점을 둔다.
교리사, 문화사, 사상사 등 사적 고찰에 큰 비중을 두는 것도 동화사 강원의 한 특징이다. 5명의 강사 가운데 교리사 강사가 따로이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역사를 통해 그것을 관통하는 핵심줄기를 발견함으로써 보다 정확하게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강원에서는 법을 이해시키기에 앞서 먼저 인도문화사를 가르칩니다. 다음은 교리발달사, 경전성립사, 선종사상사, 한국불교사를 중심으로 가르치지요. 그 다음은 경전을 중심으로 법의 원리를 이해시키고자 대승경전론을 가르치고 있어요. 인도의 문화풍토를 이해 못하면 불교의 토대를 모르고, 교리의 전반적 이해가 없으면 실천이 성립되지 않아요. 선의 실수도 중요하지만 흐름도 이해해야 신앙이 생겨나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확립돼야 민족불교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개성의 시대, 다양성이 강조되는 만큼 창唱이나 시조의 전문가를 불러 강의하기도 하고, 각자 습득할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후에는 학인들을 무조건 학원에 보낸다. 강원에서 야간대학까지 보내 주기도 한다. 다른 강원에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대구라는 도시를 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스님은 자신이 강원을 졸업하고 나서 염불도 강의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난감해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영어, 일어 등 외국어 공부를 권하고, 하다못해 그림이나 붓글씨, 다도, 침술 등 나름대로의 교화방편을 갖추도록 해주고 싶은 것이 해월 스님 생각이다.
앞으로 불어닥칠 열린 강원의 신선한 바람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