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6학년 여름 수련회에서 ‘은수화’라는 법명을 받은 불자로서 ‘해인사 신행·문화도량 건립’이라는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굳이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아니더라도 굉장한 기회였다. ‘신해인사 창건불사’라는 가제로 시작된 이 기념비적 사업은 십수번의 회의와 두 차례의 해외 종교 건축물 답사, 10개월여의 사전 작업을 거친 준비된 사업이다. 이 과정 중 필자는 2002년 11월부터 4개월간 연구원의 자격으로 프로젝트의 진행을 도우면서 해인사를 네 차례 방문할 수 있었다. 이는 보고서 준비작업으로 두 차례와 현장설명 및 심포지엄을 위해 한 차례, 마지막으로 설계경기 심사로 한 차례 방문한 것으로, 경우에 따라 당일, 혹은 1박 2일의 방문을 비롯해 3박 4일의 비교적 오랜 체류도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방문을 꼽으라면 지체 없이 첫 번째를 꼽겠다. 지금은 연구기간 동안 많이 친해져서 수시로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스님들과 처음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해인사로의 첫 여행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중이었던 내게, 대학시절 전통건축을 강의하시던 이상해 교수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당시 난 이 교수님께 미국대학원 진학을 위한 추천서를 부탁해 둔 상태여서 교수님의 어떤 부탁도 거절할 용기도 없었지만, 교수님께서는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건축가 정기용 선생님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에게도 많은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며 나의 참여를 요청하셨다. 아무리 원서 준비로 바쁘긴 했지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을까 하고 난 주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 해인사를 방문하기로 한 날 우리는 서울의 양재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나는 정기용 선생님을 처음 뵙고 인사드리게 되었다. 이상해 교수님, 연구원 정혜진과 나는 이렇게 정 선생님의 차에 올라탔는데, 운전대를 잡으시며 정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어제 3시간밖에 못 잤어. 난 꼭 먼길 가기 전날은 제대로 못 잔단 말야!”
불안하지만 우린 즐겁게 고속도로를 타고 해인사로 향했고, 초겨울의 기대치 않은 따스한 햇살과,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를 그냥 달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인적 없는 도로 위에 차를 내버려두고, 각자 사진을 찍기 위해 흩어지기를 수 차례, 해인사 건축도집을 내실 정도로 자주 다녀가시던 이 교수님의 지도보기에도 불구하고 우린 길을 잃어 김해로 들어가, 작년에 입었던 수해의 현장도 목격하며 쉬엄쉬엄 해인사를 향해 갔다. 가야산 국립공원의 입구가 보일 무렵 배가 고픈 우리는 교수님께 해인사로 전화를 거시게 했는데… “아, 스님! 저희가 조금 늦었습니다. 공양은 하셨지요? 아, 네… 저희는 괜찮습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대책 없이 괜찮다는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우리는 도착 즉시 굉장한 산동네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이제껏 먹어본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버섯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 우리는 현장 조사를 위해 박물관 뒤편 산 꼭대기로 향했다.
성보박물관에서 바라본 그 산은 나지막했고, 스님들께서 쉬 안내를 하셨기에 선뜻 따라 나서긴 했지만, 정해진 길도 없이 낙엽만 수북한 가파른 산을 올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님들께서는 “저기까지 가볼까요?”, “저쪽도 가보죠”라는 불확실한 말로 우리를 이끄셨다.(일반적으로 산은 “중턱까지 가볼까요?” “정상까지 가보죠”라고 말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가!) 뒤따라가는 우리 모습은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모두 운동화를 신고도 기다시피 나무 줄기 꽉꽉 잡아가며 낙엽에 미끄러지고 있는데, 앞서간 스님들은 승복 주머니에 두 손 넣고, 까만 털고무신을 신고서도 허리 꼿꼿이 펴고 저만치 보이지 않았다. 고생 끝에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신행·문화도량이 건립될 대지가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곧 저 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멋진 건축물을 짓기 위해 수많은 건축가가 계획할 것을 생각하니, 그 사전 준비 작업을 해야 하는 내 어깨가 무거워졌다. 산사의 어둠은 일찍 오는 터라 벌써 어두워지려 하고 스님들은 뛰다시피 벌써 다 내려가셨는데, 다시 우린 엉덩이를 깔고 미끄럼 타듯 산을 내려와야 했다.
성보박물관에서 신행·문화도량의 성격과 규모, 프로그램에 관한 회의를 가진 뒤 우린 큰절로 올라갔다. 관광지로만 찾아오던 해인사를 업무상 찾아와, 어둑해진 뒤 고요한 산사의 분위기에 자못 심취해 있으려니 늦은 저녁 공양이 나왔다. 융숭하게 차려진 저녁상을 받고 앉으려니 세민 주지스님께서 들어오셔서 지켜봐 주셨다. 그러자 정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경옥아, 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절이라는 해인사에서, 그것도 주지스님 앞에서 밥 먹는데 58년이 걸렸다. 너는 얼마나 걸렸느냐?” “24년 걸렸습니다.” “세월 참 많이 좋아졌구나!” 정 선생님께서 감격하시는 걸 보고 나는 이 자리가 얼마나 뜻깊은 자리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식사 후 주지스님 방에서 계속된 회의에 스님들과 교수님들의 이 프로젝트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으며, 그럴수록 회의는 끝날 줄 몰랐다. 산사의 칠흑 같은 어둠에 놀라, 우리는 회의를 마치고 서울로 향했는데, 돌아오는 길이라고 정 선생님의 졸음이 가실 리 없었다. 이상해 교수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핸들을 놓지 않으시던 선생님은, 서울톨게이트로 들어오는 새벽 3시까지 “아~~졸립다!”를 연발하시며 우리에게 졸음퇴치용 노래를 시키셨다.
주지스님께서 말씀하시길, 해인사는 기가 센 절이란다.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도 해인사에 머물면 힘이 넘쳐나게 되고, 해인사와 연관된 사람은 일도 잘 풀린다고 하신다. 그 말이 사실인지, 정 선생님께선 예상치 못한 큰 프로젝트가 회사에 들어왔다고 좋아하셨다. 그리고 나도 해인사의 그런 기분 좋은 정기의 도움으로 대학원 입학 허가를 무난히 받게 되었고, 해인사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전시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기쁜 건, 좋은 일을 함께 했던 좋은 인연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번 기회로 알게 되고 친해진 스님들, 교수님들, 아름지기 관계자분들… 이제 이 좋은 인연을 잘 지켜나가는 것은 나의 몫이라는 걸 안다.
끝으로 해인사 신행·문화도량 건립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스님들의 활발한 아이디어 제안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도량이 되어, 이 곳을 찾는 신도 및 관광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