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7일 꽃샘추위도 한숨 누그러진 오후. 바쁜 사무국의 일상을 잠시 접고 해인사로 향했다. 작년부터 진행되어 온 ‘해인사 신행·문화도량 건립불사’의 1차 설계경기 접수마감일이 28일이기 때문에 지원자들을 위한 작품접수 창구를 운용하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쯤 사무국의 일을 마무리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김포공항에서 정혜진씨를 만나 대구행 비행기를 탔다. 대구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현종 스님은 시내의 교통체증으로 인해 약속시간보다 30여분 늦게 도착하셨다.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대구시내의 도로는 평소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차창을 통해 바라보는 대구의 공기는 왠지 매캐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창문을 여는 것도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TV에서 보던 자욱한 연기 속의 아수라장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스님과 함께 나누며, 마지막 합류자인 도경옥씨를 태우러 대구시내를 지나고 있을 무렵 “사람이 철이 없으니, 철이~ 철이 없는 것이야”라고 문득 선문답 같은 얘기를 스님이 툭 던지셨다. 점점 문제가 되어가는 이상기온에 관한 얘기들과 대구지하철 참사에 관한 얘기들을 함께 빗대어 하신 말씀 같은데 스스로가 워낙 무지한 중생이라 얼른 알아듣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 시간 반을 넘게 달려 해인사에 도착하고 나니 절에서 공양하기는 너무 시간이 늦어 버렸고, 그래서 해인사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스님께서는 우리를 손님 대접 해주시느라 정갈한 식당으로 안내하셨고, 그 곳에서 기분 좋게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해인사에 여러 번 들렀지만 사실 해인사에서 묵어 본 경험은 없었기에 이번에는 혹시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저녁을 먹는 동안 스님께서 “젊은 사람들은 밖에서 자는 것이 편안하겠지” 하시기에 그냥 해인사 주변의 호텔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스님의 배려를 무색하게 하기는 싫었기에….
숙소로 들어서면서 “그래도 이렇게 해인사 곁에서 잠자리를 갖는 것이 어디야!!” 하고 스스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첫날이 지나고 아침 일찍 설계경기 출품작 접수장소인 해인사 박물관으로 출근(?)했다. 이것저것 준비하고, 검토하고 있는 도중에 첫 번째 작품을 제출하러온 설계경기 참가자가 도착했다.
나도 언젠가 전시설계를 하는 회사에 다닌 적이 있었기에 마감의 고통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고, 아무리 여유롭게 일을 해도 마감시간에 빠듯이 대어야 작업이 끝나는 속성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는데 접수창구를 열자마자 도착한 이 설계자가 나에게는 의외였다.
첫 번째 참가자가 돌아가고, 두 번째 작품을 제출할 사람이 접수창구에 도착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으며,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 세 번째 참가자가 접수를 마치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후가 되자 스님들이 현장에 들러 접수상황을 둘러보시고는 “너무 접수 작품이 적은 것 아니야?” 라며 약간 걱정되는 투로 말씀하셨다. 사찰의 불사를 공모형식으로 하는 일이 전무했던 일이라서 그런지 스님들도 꽤나 신경이 쓰이시는 눈치였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흐른 후 서너 팀씩 한꺼번에 접수처로 밀려들었다.
제출도서를 체크하고, CD의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에 갑자기 부하가 걸린 양 접수자들의 줄은 삽시간에 길어져버렸다.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접수창구는 정신없이 돌아갔고, 마감을 하고 나니 출품작 수는 총 37점이었다.
우리는 접수된 작품들을 밀봉하여, 금고에 보관하고 하루일과를 마쳤다. 이제 내일 도착할 심사위원들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다음날.
정오가 가까워 오자 서울에서 심사위원과 옵서버들이 현장에 도착했고, 큰절에서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시며 점심공양을 하셨다. 공양 후 심사위원 다섯 분과 해인사 관계자, 아름지기 옵서버 등 십여 명이 해인사 성보박물관 세미나실에 자리를 잡고, 좌장인 김종성 위원장이 개회를 선언하면서 심사가 시작되었다.
심사위원들에게 설계도서가 배부되고, 각자의 설계도서를 검토하는 동안 심사장소에는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모든 작품들이 나름의 해석과 아이디어로 최선을 다한 작품들이었기에 심사가 쉽지 않은 눈치였다. 오랜 침묵을 깨고 심사위원들의 의견개진이 시작되었으며, 그 의견들을 가지고 토론이 이어졌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심사가 일단락되고, 내일의 심사를 위해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날이 밝고, 다시 심사 일정이 시작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어제 밤에도 쉬지 않고 각자 작품들을 검토하는 일을 했던 것 같다.
어제에 이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분석과 평이 이어졌고, 일단 10여 개 작품들이 선발되었으며, 다시 한 번 심각한 의견개진들이 있었다.
정오를 넘길 무렵 드디어 6개 팀이 최종적으로 선발되었으며, 이틀간의 심사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심사위원이나 옵서버들 모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사가 끝나고, 모두 모여 늦은 점심공양을 했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면서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는 안도감과 아름다운 해인사를 뒤로 하고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부디 좋은 설계자가 선발되어 아름다운 해인사의 새로운 신행·문화도량이 건립되기를 바라면서 1차 설계경기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