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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볼 때 그 자신이 바로 꽃이 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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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禪話 선화禪畵 - 설곡 2003년 04월 254호
해인4월-설곡.jpg 선, 그 자체가 생태보존
요즈음 우리 불교계는 화두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에 대하여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화두선이든 위빠사나든 선 수행은 인간이 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데서 기원했다. 고대 인도의 수행인들은 불교가 발생하기 천 년 전부터 깊은 숲 속에서 마음을 맑히며 고요히 명상 수련했다. 그들은 숲 속에서 결가부좌하고 앉아 호흡을 조절하고 깊은 명상의 세계에 침잠해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깨닫고자 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생명이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선 수행은 중국에 이르러 노장 사상과 결합함으로써 더욱더 자연과 합일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선 생활이란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음의 근원을 향해 사유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와 생리를 치밀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을 자기 스스로 다스리는,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선이다. 최근 한국의 일부 선 수행가들 가운데 위빠사나를 조금 경험하고 단적으로 말하기를 ‘화두선은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방법’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화두선 수행법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선 수행법을 거쳐 발전해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선 수행은 화두선이든 위빠사나든 자연에 합일하려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 수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우선 자연을 관조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선사가 피고 지는 꽃을 무시하고 자연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이미 선사가 아니다.
자연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자연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 수행을 모르는 사람은 꽃을 보면 꺾으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꽃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사는 꽃을 볼 때 그 자신이 바로 꽃이 된다. 그것은 꽃을 보되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선이란 스스로 자연의 일부분이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요즈음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자연보호’니 ‘생태계보존’이니 하는 말도 사실은 이미 이천 수백 년 전부터 부처와 선사들이 시작한 운동이다.
선가는 사람들마다 모두 맑고 둥글어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선 수행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이 원명자재圓明自在한 마음을 흩어지지 아니하게 하고 천지와 더불어 병존竝存하게 하는 것이다. 곧 모든 사물을 볼 때 깊이 관조하여 마음의 동요, 즉 좋다 나쁘다 하는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화, 그 자연과 탈속
선화는 이러한 맑고 고요한 선禪의 마음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세간의 모든 일과 대자연의 산색, 흐르는 물, 초목화조草木花鳥, 시절경관時節景觀 등을 작가의 붓을 통하여 선심화의禪心畵意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진리에 눈뜬 선사에게는 어떤 것도 선의 대상 아닌 것이 없듯이 선화의 달인에게는 어떤 것도 선화의 주제가 아닌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선화라고 하면 달마도나 포대화상도 한산습득 등 인물화나 일원상을 연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주제에 제한은 없다. 성공한 선화가들은 인물화보다 오히려 자연을 주제로 선택한 경우가 많다. 연꽃 한 송이, 감 하나, 나뭇가지에 졸고 있는 새 한 마리, 꽃을 찾는 나비 등 이 세상 어느 것도 선화가의 눈에는 선화의 주제가 아닌 것이 없다.
그 좋은 예로 13세기 남송의 바창무시(法常牧谿)를 들 수 있다. 바창의 안목에는 선화의 대상 아닌 것이 없었다. 나한에서 불보살, 원숭이에서 용과 호랑이, 정물에서 화조 산수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제는 제한이 없다. 그는 촉의 사천에서 태어났지만 한동안 항주의 선종사찰인 원통사에서 보냈다. 항주는 서호를 중심으로 시인묵객이 모이는 예술의 중심지였다. 더욱이 남송은 선종이 성행했던 시기며 당시 항주의 서호 일대에는 원통사, 장경사, 장상사 등의 선종사찰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원통사는 많은 선화가를 배출시킨 선화의 중심이었다.
바창무시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중국에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의 작품은 오늘날 일본의 교또·나라지역의 선종사찰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는 일본의 국보와 지정문화재가 된 작품도 많다. 그의 작품 가운데 이 <팔팔조도叭叭鳥圖>는 어느 선화보다 선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은 굽고 늙은 소나무 둥치에 앉아 있는 한 마리 새를 그린 것이다. 우선 화면의 삼분의 이 이상을 여백으로 남겨 놓음으로 작품 전체에 감도는 정적靜寂이라든지 유현幽玄한 감을 신비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화면의 좌측 밑으로부터 삼분의 일의 높이에서 우측 하단을 향하여 비스듬히 굽은 소나무 둥치에 한줄기 넝쿨이 휘감은 것으로 보아 소나무의 오랜 연륜과 탈속脫俗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소나무는 몇 번의 붓놀림으로 거칠게 표현되어 있지만 연륜 깊은 소나무의 투박하고 순박한 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화면의 상단 솔잎과 솔방울은 소나무를 표현하는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의 효과를 나타내는 세밀한 부분이다.
그 소나무에 세속을 버리고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한 마리의 새는 단 몇 번의 붓놀림으로 처리되었지만 그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선禪의 이미지를 나타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마치 훌륭한 노선사가 화두 삼매에 빠진 듯한 탈속의 기분이 흘러넘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더 이상의 붓질도 더 이하의 생략도 필요 없는 완전무결한 선의 향취를 느끼게 한다.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린다면 과연 이쯤에서 붓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