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꽤나 긴 여행을 했다. “그게 바로 내 이름이야.
그래
우리는 바로 이렇게 영원히 지낼 것이다.
너의 이름은 바로 느베르다.
프랑스에 있는 느·베·르”
“Hi-ro-shi-ma.
C’est ton nom.”
“C’est mon nom. Oui.
On en est la seulement encore. Et on en restera la pour toujours.
Ton nom a toi est Nevers.
Ne-vers-en-Fran-ce.”
그리고 줄곧,
존재는 장소에 거주한다.
존재는 기억에 거주한다.
라는 두 상반된 명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 명제를 염두에 두고, 장 아누이의 연극 ‘도둑들의 무도회’의 대사 한 토막을 들어보자.
‘어떤 질質의 공간은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한다.’
‘공간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한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는 이 말은 20세기 거장(Master Builder)들이 확신했던 환경결정론(environmental determinism)과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 그리고 상징적 표현(symbolic expression)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나의 건축적 사고를 지배해왔던 ‘건축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그 속에 있게 될 삶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모더니즘적 정의定義가 요즈음 들어 자꾸만 부담스러워진다. 이러한 담론의 본질적 의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이러한 언설에 내포되어 있는 ‘건축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조작’하려는 위험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상주의가 너무 넘쳐나면서 거장들의 작업은 자신들이 만든 시대정신의 틀로 세상을 조작하려 했고, 그래서 그들의 도시와 건축은 시간성(process)이 배제된 일정한 목표가 완성된 다음에야 작동해야 하는 그러한 것이었다.
만일 모든 사회, 특히 다원화된 현대사회는 하나의 지배적인 그 무엇이 항속恒續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균열하고 해체되며, 또 재구축되는 과정에 있으며, 그 변화의 인자는 지금까지 사소하게 보였던 일상들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지난 시대 거장들의 사고와 작업은 어떤 방법으로든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전체를 추상시킨 전능과 질서가 쌍을 이룬 환상(the twin fantasies of order and omnipotence)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 손에 닿을 듯한 사소한 것들이며 이러한 미세한 것들이 의미를 가지게 되고 신화가 되며 축적되어 역사가 되는 도시와 건축이 요구된다.
이제 ‘건축의 생명은 영원하다’ 또는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다’ 등의 20세기적 암묵적 합의에 대한 진지한 의심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전자적 기술과 산업의 본질적인 가치는 오히려 단명성과 변화에 있으며, 건축의 가치는 공간의 미학에 있지 않고 다양한 삶을 그 속에 있게 하는 조직의 개념이 지배하는 ‘장치물’일 따름이다. 그리고 도시는 단일한 개체로서의 건물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조직하는 관계들을 더 주목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철학 또는 미학에서 떠나 고고학, 인류학, 언어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으로 옮아간다.
그래서 이 시대의 도시와 건축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보다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그것도 아주 미세하게 변해 가는 삶을 위한 배경(background)이나 장치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떤 삶과 사고를 강요하는 상징적 형상은 이제 사라져 주어야 하고, 공간의 감각은 지속적으로 일의적一義的 감동을 제공하는 것이라기보다 가능한 한 가능성으로만 가득 차 있도록 중성적이고 얇아야 한다. ‘건축은 빛 속에 자태를 드러낸 매스들의 교묘하고 정확하며 장엄한 유희(Architecture is the mastery, correct and magnificent play of masses, brought together in light/Le Corbusier의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라기보다 삶만이 드러나는 빛과 바람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보편공간(universal space), 색깔이 제거된 불확정적인 공간 (indeterminate space)이 좋다.
이러한 생각은 ‘건축들이 모여 하나의 특질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일반화된 생각에서부터 ‘환경 또는 땅(site)의 조건들에서 건축이 도출(generate)되어야 한다’는 건축을 보는 관점을 전환하게 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무성격의 공간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불확정적 공간을 특별하게(specific) 할 것이다. 땅의 변별성이 공간 또는 건축의 변별성이 되는 것이다.
이는 건축을 하나의 오브제로 보기보다는 환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인자로 보는 것이며, 따라서 건축과 건축, 건축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더 주목하여 인간과 환경에 대하여 건축이 가져야 할 윤리의식이 더 중요한 자리를 점한다. 이런 연유로 지난해 새 천년을 여는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2000의 ‘덜 미학적인, 그래서 더 윤리적인(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검박儉朴한 집은 선善하다’라고 의역해 볼 수도 있는 이 주제는 과학과 이성이 쌓아놓은 20세기의 성취들을 심히 우려하는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현재적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이기도 하며, 이제 우리의 건축에 대한 관심이 미학에서 윤리로 이행하리라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땅과 사람에 대한 건축의 윤리.’
이럴 때 우리는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여긴 자연관에 근거한 우리의 전통건축들, 특히 기오寄傲의 정신으로 자연을 향해 열린 수기공간修己空間을 만들어낸 조선 선비들의 집들이 나에게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되고 이러한 집들을 유산으로 가지고 있음에 넉넉한 자긍심을 가진다.
집의 모양을 내 의지대로 상상해 그려내기보다 우선 주변의 환경을 잘 살필 것이고, 그 살핀 결과가 설정하는 조건들로 집을 만들어 이것이 한동안 환경과 끊임없이 서로 주고받으며 세련되어져 가서 어느 날, 그 집도 주변환경의 한 인자로 근사하게 변용變容되기를 기대한다.□
1. ‘히로시마 내 사랑’의 현장 느베르를 관통하는 느와르강
2. 르 꼴뷔지에, 피난의 도시, 파리
깨끗한 공기를 주고, 밝은 장소, 좋은 식사 등 물리적으로 안락한 환경에서 거주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개조하거나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된다는 믿음,
즉 환경결정론이 극명히 드러나는 건축.
3. 쥐세페 떼라니, 파시스트의 집, 이태리
모든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극단적으로 추상화된 기하학을 도입함으로써 평등사회를 실천하려 한 건축.
4. 알버트 스피어(Albert Speer) 누렘버그 시위집회(Nuremberg Party Rally)
누렘버그 시위집회의 극적인 조명효과는 네빌 헨더슨 경이 명명한 ‘얼음의 대성당(cathedral of ice)’을 창조하고 있다.
이 공간 속에서는 누구나 ‘하이 히틀러!’를 외칠 수밖에 없는가.
5. 아돌프 히틀러+알버트 스피어, 베를린 신도심 계획
개선문과 거대한 홀(the Great Hall)을 잇는 베를린의 신도심 계획. 고전주의 양식의 거대한 확대가 파시즘의 과대망상을 반영하고 있다.
6. 르 꼴뷔지에, 라 뚜레뜨 수도원, 프랑스
바깥에서 느끼는 사각형의 강인한 느낌과는 달리 가운데 오픈스페이스를 끼고 복잡하게 전개되는 공간의 변화와 빛의 처리는 고요에 가득 차 있다. 현대작곡가 크제나키스(Xenakis)가 협력하여 설계하였다는 통로의 리드미컬한 빛의 움직임과 어두운 부속 성당의 제단에 떨어지는 원색의 빛조차도 정적 속에 묻혀 있다.
7. 또로네 수도원, 프랑스
라 뚜레뜨 수도원 공간의 교과서였던 또로네 수도원의 성당과 중정의 회랑.
8. 갈루쪼 수도원
라 뚜레뜨 수도원의 또 하나의 교과서. 수도원에서의 공동생활과 개인생활의 구분과 관계가 잘 드러나고 있다.
9. 찬디가르, 푼잡, 인도
새로운 국가를 새로운 정신으로 건설하려던 네루와 새로운 정신의 새로운 도시를 실현하려는 르 꼴뷔지에가 의기투합하여 만든 푼잡의 새 수도 찬디가르.
도시의 시간성을 외면하고 다 완성된 후에야 작동하는 도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10. 렘 콜하쓰, 국립도서관, 파리(프로젝트)
다원화 시대의 도시와 건축은 전능과 질서가 쌍을 이룬 환상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의 영역들을 흩으러 놓음이 될 것이다.
11. 미이스 반 델 로에, 신 국립미술관, 베를린
삶만이 드러나는 빛과 바람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보편공간.
12. 유고관, 베니스 비엔날레 2000
‘덜 미학적인, 그래서 더 윤리적인’의 주제를 내건 베니스 비엔날레 2000은 이제 건축에 대한 관심이 미학에서 윤리로 이행해야 할 것임을 강하게 예측하고 있다.
13. 병산서원, 안동
천지인을 하나로 여긴 자연관에 근거하여 조선의 선비들이 기오의 정신으로 자연, 낙동강과 병산을 향해 열린 수기공간.
14. 파주출판도시, 파주, 경기도
기존의 도시설계를 받아들임으로 해서 여기의 건축들이 오브제화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여기에서 제안된 건축의 유형들은 땅이 가진 조건에서부터 연유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