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한두 해 정도 전라북도의 한 조그마한 암자에서 살고 있는데, 신심행이라는 보살님이 ‘전라북도의 큰스님 한 분이 전주에 오신다’며 만나뵙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지게를 내던진 채 하던 일을 놓고 도망쳐 나왔다. 열넷 어린 마음에 절에서 잡으러 오는 줄 알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을 넘어 그렇게 도망나와 큰스님을 뵈러갔더니, 이미 날짜를 하루 넘겨 스님께선 떠나시고, ‘충남 보덕사로 찾아오라’는 전갈과 2백환을 넣은 돈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덕사에서 한 오리 정도를 걸어올라갔던 것 같다. 보름달을 맞으며 양 길가에 아름답게 피어 있던 달맞이꽃을 벗삼아 올라갔더니, 스님께서 여러 스님들에 둘러싸여 삭발을 하고 계셨다. 비구니스님들이 나를 보더니, ‘전주에서 꼬마가 왔다’고 하며, 어지간히 내가 새카맸던지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깎아 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스님을 뵈었는데, 그리도 엄숙해 보일 수가 없었다. 절을 하고 앉은 내게 스님께서 반가운 표정으로 ‘무엇을 했느냐’고 자세히 물으시길래, ‘꼴도 베고 나무도 하고 일도 했다’고 대답했더니, 다시 반가워하시면서 옆방에서 자라고 하셨다.
그날 밤, 그렇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한평생 존경하고 사모했던 나의 스승이신 해안海眼 선사를 뵈었다. 스님께서 조실로 계셨던 그곳에서 한 철, 그리고 내소사 지장암으로 가서 해인사 강원으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 서너 해 스님을 모시면서 생활 자체가 법이었던 행자시절을 보냈다.
여름 어느 날, 보덕사 누각에서 대중스님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였다. 한 스님이 내 얘기를 하면서 ‘스님의 상좌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마 내 사주를 본 모양이었다. 나는 그 얘길 듣는 순간, ‘꼭 스님의 상좌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스님께선 그 말을 듣고 아무 말씀도 안하고 듣고만 계시더니 나중에 나를 불러 ‘하루에 일만배씩 열흘을 하라’고 하셨다. 낮엔 스님 곁에 있다가 저녁에 혼자 있으려면 집생각이 나고, 남자라곤 스님과 나, 부목뿐 모두 비구니스님들이었고, 먼 데 와 있는 것이 무서웠던 때였다.
일념으로 하루에 일만배씩 열흘 동안 십만배를 하고 나니, 스님께서 청소하는 것에서부터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다. 무엇을 배운다는 생각조차 없이 스님 말씀이 떨어지면 그대로 행했던 시절이었다.
스님께선 어린 상좌에게 목탁 치는 법이며 염불하는 것을 가르쳤고, 금강경을 외우다 모르는 것이 있어 여쭈면 주무시다가도 일어나 가르쳐 주셨다. 나는 그 때 스승은 무엇이든 물으면 가르쳐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는 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안했고, 그 때부터 스님을 모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스님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다. 스승이 시키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며, 그것이 사제지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스님은 내게 ‘불교가 무엇이다, 수행자란 이런 것이다’라는 말씀은 거의 하지 않으셨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일상생활 속에서 법을 깨닫게 하셨던 것 같다. 지장암에서 스님을 모시고 살 때, 스님은 종종 내소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 ‘산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면서 ‘산을 보거들랑 산의 부동不動함을 배워라’ 하셨고, 흐르는 물 앞에선 ‘만물의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는 모습’을 보도록 가르치셨다. 뾰족한 나뭇잎을 보고도 그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셨으니, 일상생활의 모두가 법임을 배웠던 것이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계시면서 공부를 시킬 땐 엄숙하여 누구든 무서워했으나, 일상생활에선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하셨다. 정도 많고 눈물도 많으셔서, 보은報恩불사를 끝내고 신도들이 돌아가면 일주문 밖까지 나가셔서 그들의 모습이 가물가물 사라지도록 오래 바라보던 뒷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 때 스님의 전송하는 모습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했다. 스님은 또 멀리서 수좌스님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반갑게 대할 수가 없었다. 땀을 훔치며 걸망 지고 들어서는 후학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모습은, 스님들 세계에 남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한다.
일 년에 한 번 두부를 먹어볼까말까 할 만큼 가난했던 지장암 시절엔 농사짓는 일 등 일이 많아서 출가하러 왔다가도 못 견디고 돌아갔으나, 나는 스님 곁에 있는 것으로 족해 그런 마음을 한번도 먹지 않고 한시도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멀리서 들려오는 스님의 목소리, 기침소리만 듣고도 원하시는 걸 감지하고 그대로 대령하곤 했다. 그러면 스님께서, ‘내가 물을 먹고 싶었는데 네가 알고 떠왔구나’ 하고 기뻐하셨고, 가을이면 산에 올라가 다래며 머루, 으름 등을 따다 드리면, ‘어디서, 어떻게 따왔니’ 하시면서 그렇게 잘 드시곤 했다. 스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 또한 기쁨으로 차오르곤 했다.
추운 날이면 나를 당신 방으로 불러 재우곤 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보면, 스님께선 반듯하게 정좌하시고 앉아 염불을 하시거나 금강경을 독송하고 계셨고, 나는 어느새 스님 요로 올라가 자고 있었다. 스님은 내게 엄한 스승이시자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세상에 태어나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 준 분이 나의 스님이셨고, 나 또한 부모보다 더 스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스님께서 돌아가신 지 스무 해가 넘었지만 지금도 스님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간절하고 이 생에서 그분을 만난 기쁨으로 출렁인다. 아, 어느 생에서 스님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스님은 내가 보덕사에서 행자로 있을 때부터 참선을 시키셨다. 어느 날 우물가에서 걸레를 빨고 있는데 다가오셔서, 주장자로 우물을 세 번 두드리시며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시길래,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뒤로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주시고 공부하게 했다. 그뒤로 늘 화두에 대해 문답을 주고 받았는데, 스님께선 법회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동명이 공부를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내 앞에선 칭찬을 하시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좋은 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어린 상좌를 기쁘게 했다.
스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든 공부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준 선지식이다. 선지가 투철한 대선사이셨고 시문詩文에 능하셨던 스님께선 내게 시를 읊어 주시며 받아 적게 하셨고, 스님들이나 신도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 적게 하셨다. 아마도 스님처럼 편지를 많이 쓰신 분도 드물 것이다. 스님은 내게 글을 짓는 법에서부터 말하는 법까지 수행자가 지녀야 할 법도 등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스님의 그러한 가르침은 내 평생의 살림살이로 남아 가슴속에 구석구석 살아 있다.
스님의 공부에 대한 지도방법은 독특했다. 용맹정진을 할 때 한 사람씩 불러들여 대화를 하시면서 잘못된 점은 지적하고 혼을 내어 분심과 의심을 일으키게 해서 그로 하여금 틈을 두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셨다. 제자가 다른 틈을 두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참선이고 간경이고 공부였다. 내가 지금 전등사 선방에서 지도하고 있는 공부방법도 물론 스님께 그대로 배우고 익힌 것이다.
그저 무심히 스승 곁에서 스님이 시키는 대로 행하며 공부했던 행자시절이었으나, 쉰이 넘은 지금 와 생각하면 일주문 안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출가의 길이란 그렇다.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수없이 많지만, 출가의 길이 가장 즐거울 수 있어야 고생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장애 없이 출가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행자시절은, 내 생애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모했던 한 사람, 스승 곁에서 그런 시절을 보냈던 가장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