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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깨달음과 큰 닦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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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 박종린 1990년 10월 104호
깨달음이 전부가 아님
불교를 깨달음〔悟〕의 종교라고 한다. 더욱이 스스로가 깨닫는〔自覺〕종교라고 말한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일진대 과연 그 깨달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또한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으며, 왜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다. 불교의 근본이 깨달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우리에게 그만큼 중차대한 문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해서 깨닫지 않으면 불교를 헛하는 것이 되고 만다. 아니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교조인 부처님부터가 집을 나와 6년 고행 끝에 대각을 이루었고, 역대 조사가 또한 그러했다. 지금도 불조(佛組)의 혜명을 잇기 위해 곳곳에서 깨달음에 몰두하고 있다.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깨달음을 향해 피나는 정진을 하고 있다. 만사를 뿌리치고 깨달음을 이루려는 지난한 작업에 매달리는 그 모습은 외경심과 함께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깨달음은 이토록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거기에 매달려 이루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깨달음이 물론 중요하고 근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깨달음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불교의 본질을 등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해하고 지향하는 깨달음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그야말로 깨닫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지만, 설령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을 구체화시키는 일을 병행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깨달음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무용론으로까지 발전되어 심각한 역작용을 낳기까지 한다. 깨달음이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며, 의미없는 일에 매달리는 모습이 어찌 가치를 지닐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깨달음이 깨달음다워지려면 반드시 닦음〔修〕이 수반되어야 한다. 깨달음과 닦음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이지 주종(主從)이나 선후경중(先後輕重)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때문
에 단박 깨닫고 단박 닦든〔頓悟頓修〕, 단박 깨닫고 점진적으로 닦든〔頓悟漸修〕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물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큰 차이가 있고, 복잡미묘한 해석을 지닌 말임을 모르는 바 아니로되, 여기서는 논외로 두자. 다만 입각점과 그 과정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순수·비순수를 떠나 널리 이로운〔饒益〕깨달음이라는 면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성은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전제로 할 것은 깨달음은 누구나 얻을 수 있고, 깨달음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만유공통의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깨달음이란 엄청난 그 무엇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상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깨달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은 깨달음이 아닐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저 알음알이〔知解〕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른다. 한낱 지식에 불과한, 기껏해야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解悟〕을 가지고 감히 깨달음을 논하는 자
체가 도시 말이 안된다고 할지 모르겠다.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解悟〕과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證悟〕은 엄연히 다르다. 단지 이런 구분을 떠나 깨달음 자체를 어렵고 쾌 생각하지 말자는 것일 뿐이다.

께달음보다 닦음이 더 중요
깨달음이 아무리 위대해도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닦음이라는 과정이 없이는 곤란하다. 때문에 깨달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닦음이다. 아니 닦음은 깨달음 못지 않게 중요한 깨달음의 아류가 아니라, 어떤면에서 깨달음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또 중요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실제의 구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닦음은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이며 ‘동적인 실천행’인 것이다. 이에 비해 깨달음은 오로지 하나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며 ‘정체된 앎’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말은 어디까지나 사견일 뿐 아니라 적확한 표현이 아님은 물론이나 한국불교의 그릇된 모습이 이렇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고 해야겠다.
깨달음과 닦음은 약과 음식에 비유된다. 깨달음이라는 약이 잘못쓰여짐으로 해서 병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신음하는 환자들을 살려 내기 위해서는 닦음이라는 음식을 쓸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특효약’이 과대선전됨으로써 닦음이라는 ‘음식’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았다고나 할까. 도대체 음식을 떠나서 무슨 좋은 약이 있단 말인가.
음식을 가장 좋은 보약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어떤 특효약도 제 효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약이 쓰러진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할진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더구나 그것으로 건강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나 될 법한가.
우리는 여지껏 깨달음이라는 약을 너무 남용해 왔다. 남용한 정도를 넘어 만병통치약으로 착각해 과다복용한 결과, 건강에 결정적인 위해를 가져왔다. 사실 만병통치약은 흔치도 않을 뿐더러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도를 얻을 수 있는 경우는 상근기의 몇몇 사람과 그야말로 일대사인연으로 태어난 극소수의 사람에 한할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약으로 병도 고치고 건강도 유지하려는 태도는 크게 잘못되어 있다. 약은어디까지나 아픈 사람에게만 사용되어야 한다. 때문에 병들지 않은 사람에게는 깨달음이라는 약보다는 닦음이라는 음식을 꾸준히 먹게 해야 한다. 이것이 건강유지의 비결임을 알도록 깊이 인식시켜야 한다. 동시에 약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만큼 깨달음이라는 약이 남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빨리 고쳐야 할 한국불교의 병폐이자 맹점이다. 약이 남용되는 한 음식은 소홀히 취급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깨달음이라는 약의 효능이 강조되기보다는 닦음이라는 음식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어야 할 혼란기요, 위기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대선지식과 지도자는 이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할줄 안다. 썩은 것을 되살리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상하지 않은 것을 싱싱하게 보존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요청되는 때이다.

닦음을 통한 깨달음으로 뿌리내려야
아무리 위대한 깨달음도 삶이라는 터전을 떠나서는 하등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삶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깨달음이 삶다운 삶을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깨달음이 부평초여서는 곤란하다.
본디 깨달음은 삶에 뿌리내리기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그릇된 깨달음에 대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 병폐는 자못 심각하다. 해서 더 이상 깨달음에 매달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다. 깨달음에 집착하는 한 병든 사람을 고치기는 커녕 멀쩡한 사람 병들게 하기 십상이다. 더이상 깨달음이라는 신기루에 우리 자신을 맡겨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굳이 깨달음에 의미를 두고 싶다면 닦음이 곧 깨달음이라는 등식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닦음은 어디까지나 행함이요 실천이다. 하찮은 것도 하찮아 하지 않음이고, 크고 대단한 것 못지 않게 중요시 여김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거듭 새롭게 태어남이다. 그래서 닦음은 ‘내 존재에 대한 확인’에 다름 아니다. 내 존재에 대한 확인은 한번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니까. 따라서 닦음은 부단한 것이다. 끊임없는 것이기에 큰 의미를 담고 있다.
닦음은 또 ‘시시각각의 깨달음’이요, ‘작은 깨달음의 연속’이다. 오매일여(寤寐一如)와 염념불망(念念不忘)이 닦음이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작은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닦음이다. 때문에 닦음은 구체적인 행이요 실천이 될 수밖에 없다. 닦음이 필요하고 강조되어야 할 근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실천력이 약한 한국불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닦음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와 같이 깨닫고 나면 모든 행원(行願)이 원만하게 성취된다는 견해로는 한국불교를 되살릴 수 없다. 행이 결여된 종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행과 연결되지 않는 깨달음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깨달음 속에는 분명히 닦음이 있고, 닦음 속에는 깨달음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은 깨달음과 닦음은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을 강조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굳이 닦음을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에 비해 닦음이 경시되어 왔고, 그 결과가 한국불교의 오랜 침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행할 것은 행해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깨달음은 작아도 닦음은 커야 한다. 작은 깨달음을 얻고도 크게 닦아나갈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큰 깨달음을 얻으려기 보다는 작은 깨달음을 통한 큰 닦음을 이루려는 데서 한국불교의 새로운 활로가 모색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