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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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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3년 03월 253호
누군가는 인생을 한 편의 소설이라 하고 연극이라 한다. 한 폭의 그림이라 하고 음악이라 한다. 때론 한 편의 지루한 소설 같은 이 삶이 색이 잘 조합된 멋진 그림 한 폭으로 다가설 때가 있고 박진감 넘치는 연극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잘 정돈되어 산뜻한 음악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몸서리치게 쓰고 서릿발같이 시리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겐 시간과 공간 위에 하루 하루가 날실과 씨실 되어 엮어 내는 이 삶이 선물이다. 누군가에겐 성공이나 실패가 있는 하루이고 웃음과 눈물이 있는 하루다. 이별과 만남이 있는 하루이고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하루이기도 하다. 문득 이런 하루가 귀하게 여겨진다. 마음에 질서가 있어 잘 보낸 하루는 입안 가득히 고이는 향기 좋은 차 맛 같고 가슴 가득히 충만함이 있다. 그래서 더더욱 선물이다.
사람들은 흔히 타인이 누리고 사는 삶에 자기의 삶을 견준다. 물론 자기보다 여러모로 형편이 나은 사람에게 말이다. 집의 크기를 비교하고 재물을 비교한다. 잘나고 못난 것을 비교하고 입고 있는 옷을 비교한다. 자동차의 크기를 비교하고 직장이나 손에 있는 일을 비교한다. 그러면서 성공과 실패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자신의 그릇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상대적인 허탈감에 공허하고 가난해진다. 때론 어깨가 우쭐하고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이 부자가 되기도 한다. 참 부질없는 일이다.
타인이 누리고 소유한 것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난하고 부족하다. 그러나 자신이 소유하고 누리고 사는 삶을 생각하면 시시로 부자고 날마다 부자가 된다. 그리고 온전하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우선 자연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얼마인가. 그 값어치를 따질 수 없고 어떤 보물에도 견줄 수 없다. 모든 형상에 닿는 순간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밝은 햇살과 모든 생명체를 숨쉬게 하는 맑은 공기며 담담해서 질리지 않는 맛 좋은 물을 세상 어느 보배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저 받은 선물이 너무 많다.
꽃향기 실어 주는 바람과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비와 눈을 더하지 않더라도 눈 맞추고 웃을 수 있는 꽃이 있고 농부의 정성스런 손길에 이루어진 밭이랑에 핀 곡식의 꽃이 있어 배를 부르게 한다. 생각만 해도 즐겁고 부자다. 나무와 잡초가 서로를 견주지 않듯이 강과 바다는 서로를 인정한다. 하늘에서 자유로운 새와 물에서 자재를 얻은 물고기는 서로를 시기하지 않는다. 큰 산은 작은 산을 아우르고 작은 산은 사람을 품는다. 너와 내가 그리고 모든 삼라만상이 다 고유한 세계다. 세상 참 아름답다. 크고 작음이 있고 미추가 있고 빠르고 더딤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잿빛 옷은 산중에서 제격이고 물색 옷은 도심이라야 제 빛을 발한다”는 어느 어른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새는 하늘을 날 때 격이 있고 물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칠 때 제 격을 갖추듯이 사람이 ‘사람다운’ 행위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할 때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아름다운 행위를 인정하고 귀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실수나 잘못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 중의 사람이다.
학인 시절 강원에서 함께 뒹굴며 살았던 도반들이 일년에 한 번 만남을 갖는다. 그런데 유난히 우리 도반들은 서로를 아끼고 칭찬하며 자랑스럽다 한다.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며 마주보고 파안대소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자화자찬 격이니까. 그러나 도반들이 서로 격려와 칭찬에 인색하지 않고 각자가 가진 다른 장점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그 말이 서로를 키워 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선원에서 좌복을 여의지 않고 정진하는 도반들은 그들대로, 규모는 작지만 대중 교화에 뜻을 둔 도반은 도반대로, 학문을 하는 도반은 또 그들대로 열심히 산다. 그래서 모두 주어진 소임따라 도반들을 거울삼아 열심히 정진한다고 말한다. 서로가 모두 좋은 선지식을 가졌다. 그리고 서로가 모두에게 선물이다.
내가 가까이 지내는 도반 중에 한 스님은 여러모로 선수다. 선원에서는 참신한 선객이고 음식을 할 때는 일류 요리사가 된다. 아래위로 인간관계가 좋고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솔선하지만 의욕이 너무 지나치지 않는다. 먹물 잘 들이고 풀 먹여 손질 잘 한 푸세옷처럼 부처님을 향한 사상의 날도 무디지 않았다. 언젠가 그 도반에게 “스님의 음식 솜씨가 참 부럽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운문사 학인 시절 화엄경반이었을 것이다. 나는 종무소 회계 소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도반 몇 명이 모여서 계곡에 가서 국수를 삶아 먹자고 했다. 나는 소임자라고 입만 가지고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종무소에만 있으니 갑갑하던 차에 너무 반가워 따라 나섰다. 작은 솥을 계곡에 걸고 물을 끓이더니 국수가 삶아지고 어느새 열무김치에 양념을 한 비빔국수가 한 그릇씩 주어졌는데 그 맛이 최상의 맛이었다. 그 때도 그 도반이 솜씨를 발휘했었다. 나는 가끔 그 도반한테 그 이야기를 한다. 아직도 그 국수 맛을 잊지 못하고 있노라고. 그런데 나는 음식하고는 인연이 없는 듯하다. 제대로 요리법을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음식 솜씨에 대한 선물은 받지 못한 것 같다. <맑고 향기롭게>에서 법정 큰스님을 모시고 일을 할 때였다. 불일암에서 큰스님의 고소간장을 만들어 보라는 명을 받고 고민하다가 우리 조선간장으로 고소간장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짰던지 한동안 놀림을 받았다. 그 일이 있고 한참 후에 감자 볶음으로 만회를 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실수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진 유형무형의 선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우선 꾸준히 선방을 여의지 않으시고 정진하시며 작은 것에도 알뜰하시고 남을 배려하는 데 뒤지지 않는, 따뜻하고 자상하신 성품을 가진 은사스님과 새의 양 날개같이 든든한 두 명의 사제와 항상 마음의 지주 역할을 해 주시는 운문사 학장스님과 문수선원 선원장 스님, 그리고 인연이 지중한 어른 스님들 모두 인연으로 온 선물이다. 그리고 격려와 탁마를 아끼지 않는 몇몇 도반들이 빼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다. 수행자에게는 스승의 인연이 무엇보다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토지연이 맞아야 한다. 또 빠질 수 없는 인연은 수행하는 데 성심과 신심으로 외호하는 단월의 인연도 중요하다. 많지는 않지만 몇 명의 단월도 참 좋은 인연의 선물이다. 먹을 음식과 법복이며 지식을 더해 주는 책과 음반이 다 선물이다. 하고 있는 일이 선물이고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이 선물이다. 이렇게 선물이 참 많다.
이 세상의 사람 중에 모든 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분야나, 또 소유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자면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부족함이란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요인이 아니라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수많은 작은 산이 큰 산을 우뚝 솟게 만들고 잡초는 꽃을 돋보이게 한다. 그렇듯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할 줄 아는 한 가지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늙음이 젊음을 시샘하고 질투해도 다시 젊음을 간직할 수 없고 강이 바다를 부러워해도 바다가 될 수 없다. 마음의 폭이 넓고 깊어져 늙음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면 젊음이 부럽지 않을 것이고 바다가 품이 넉넉하지만 굽어 흐르는 강의 유려한 곡선은 오직 강이 지닌 아름다움일 것이다. 타인과 내가 서로의 선물로 자리하고 하루 하루를 값진 선물로 여긴다면 삶이 풍요롭고 덜 고달플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열등과 가난으로 못난 업을 키워가고 작은 만족으로 부자가 되기도 한다. 어느 방향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는 자기 몫이다.
수행자의 마음 살림이 가난하지 않길 바란다. 물질에 노예가 되어 가난한 업을 쌓지 않길 바란다. 높은 산을 우러러보면서도 당당하게 자리하는 낮은 산처럼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꽃을 아름답게 하는 잡초처럼 겸손하길 바란다. 주어진 선물을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간직하길 바란다. 이 하루가 선물이고 내 삶이 모두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