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경주에 있는 분황사 앞에서 한 외국인 가족을 만난 적이 있다. 분황사 석탑 네 귀퉁이에 의젓하게 앉아서 탑을 지키고 있는 돌사자를 가리키며 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사자가 너무 귀엽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탑 주위를 돌다가 사자에 다가가서는 연신 귀엽다고, 예쁘다고 평하고 있었다. 부모는 아이의 평가를 귀담아 들으며 가족사진이 아닌 돌사자의 독사진을 찍고 있었다.흔히 좋은 물건이나 멋있는 건축을 보면 난 “예쁘다”고 말한다. 사람도 좋으면 “그 사람, 참 예뻐”라고 말한다. 과연 예쁜 것과 안 예쁜 것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고 많아야 7살 아니면 8살쯤 되는 파란 눈의 아이가 확신 있게 얘기하는 “예쁘다”의 가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예쁜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예쁘고 정성이 들어간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빨리 만들어서 서둘러 팔아 돈을 만드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튼튼하게 만든 것도 아니었다. 쓰는 사람 입장에서라기보다는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든 물건들이 넘쳐났다. 건물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철근과 시멘트를 적게 쓴 건물들을 지어댔고, 다리도 겉으로 꾸밀 줄만 알았지 내부는 부실했다. 국적도, 의미도 불확실한 건물과 자동차, 옷과 디자인들이 도시를 가득 메우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노라고.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먹고 살기 힘들었을 예전에 지어지고 만들어진 건축물들과 물건들은 어째서 천년이 지나도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일까.
도시에 적을 두고 살아가다 보면 시끄러운 소음 공해뿐만 아니라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는 시각 공해도 많이 만난다. 요란한 불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도심의 밤 풍경이나 지워도 지워도 날아오는 스팸메일의 낯뜨거운 장면, 흉물스럽게 방치된 공사현장들, 수없이 뿌려지는 광고전단지들….
도시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번 두 번 찾기 시작했던 절의 매력에 흠뻑 빠져 전국의 절을 찾아다닌 지 몇 년이 흘렀다. 무작정 절을 찾아가 잠을 재워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절 아래 민박집에 자고 있다가 새벽 달빛에 이끌려 절 마당으로 향하기도 했다. 오렌지 빛깔로 물드는 산사의 일출에 감격스러워하기도 하고, 산빛 깨치기 전에 일어난 절의 모습에 반해 툇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아름다움을 새기기도 했다.
처음엔 무작정 ‘좋다’는 느낌만 들었는데,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니 작고 귀한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핀 문살의 꽃들이 그랬고, 아무렇게나 쌓은 듯 하지만 틈 하나 없이 잘 쌓은 자연석 석축이 그랬다. 황토벽에 소담스럽게 핀 꽃담장이며, 대웅전 천장을 화려하게 수놓은 연꽃무늬들, 그 천장을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는 봉황과 용들… 엄숙하고 장엄한 줄로만 알았던 절 구석구석에는 다람쥐가 쌩하고 지나가는 것이 조각되어 있는가 하면, 바닷속 게 한 마리가 나와 기둥 초석을 느리게 지나가기도 했다.
절은 한 마디로 ‘예쁜 것’ 투성이였다. 오래 된 탑 끝에 매달린 풍탁이나 시간에 풍화된 부도에 곱게 조각된 가릉빈가의 모습도 예뻤지만 무엇보다 예쁜 것은 절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옥류가 흐르고, 바람마저 청명한 그 곳에 산세를 위압하지 않는 당우들이 안착해 있었다. 처마 끝이 날렵하긴 해도 산을 찌를 만큼은 아니었으며, 당우들이 꽉 들어차 있어도 연못이 왜소해 보일 만큼은 아니었다.
도시에 있는 건물들이 예쁘지 않은 것은 주변환경을 생각지 않은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건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하나로 본다면야 나무랄 데 없는 건물이라도 단층건물이 많은 지역에 홀로 우뚝 솟아오른 고층빌딩이나 역사와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오만하게 거리를 향해 비껴서 있는 건물들은 그다지 탐탁하게 보이지 않는다.
모든 보이는 것들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 때 언어는 설명적이기도 하지만 직관적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경전에 새겨진 무수한 경구들만큼 위력있는 것이 잘 새겨진 연꽃 한 송이이듯 수많은 생각과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디자인인 것이다.
해인사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곳 중 하나는 바로 일주문에서 해탈문 오르는 길. 때로 그 앞에 서면 길이 있다는 것만으로 전율이 일곤 한다. 조바심 나게 경사진 것이 아닌 야트막한 오르막. 세상의 무수한 길을 걷다가도 그 길 앞에 서면 겸손해진다. 길은 내게 이야기한다.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고 살라고. 그래야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난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싶다. 주고받는 명함 속에서 과시와 욕망이 아닌 배려와 사랑을 읽고 싶고, 관심과 문화가 살아 있는 지하철을 타고 싶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아파트가 아닌 대화와 정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고, 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도심을 걷고 싶다.
천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들이라면 천년 전에 지어진 절에 와서 그 마음씀과 생각을 어떻게 그릇에 잘 담아냈는지 보고 배울 일이다. 그래야 지은 지 20년도 안 되어 무너지고 주저앉는 일들이 없어질 테니. 하지만 대웅전보다 더 커진 강당과 요사채는 무엇으로 설명을 해야 될지, 난감한 일이다. 디자인에 앞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욕심을 줄이는 일이 더 급선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