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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 지나가는 곳보다 먼저 갈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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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禪話 선화禪畵 - 설곡 2003년 03월 253호
리양카이 파죽도/송나라 런던에 살면서 한 분의 위빠사나 수행승을 만났는데 미국 출신인 아잔 스메도 스님이다. 그는 일찍 태국에 가서 아잔 차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내가 런던에 있을 당시 그는 영국 불교를 이끄는 승가협회 회장직을 맡았던 스님이다. 어느 날 그는 포행(걷기 명상)시간에 나에게 세속나이가 얼마냐고 조용히 물었다. 50이 넘었다고 했더니 자신은 76세라고 했다. 수행이 잘 되느냐고 다시 물으면서 자기는 70이 넘어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고 깊은 집중에 들어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 말씀에 그가 진정한 수행자라는 느낌을 깊이 받았다.
가야산의 성철 스님은 시중드는 나에게 항상 “도둑놈”이라고 불렀다. 어렸던 나는 아무것도 훔친 것이 없는데 왜 도둑이라고 하느냐고 항의했다. “너는 매일 부처님 밥을 먹고 밥값을 내지 않고. 나의 법을 듣고 학비를 내지 않으니 너야말로 도둑 아이가.”라고 하셨다.
황매산黃梅山의 홍인 선사는 어느 날 문도 대중을 향해 다그치듯 말씀하셨다. “밥값을 내라! 대중들이여, 밥을 먹었으면 밥값을 내야 하지 않는가!” 선사의 다그침에 대중은 말이 없었다. 신수 대사가 며칠을 궁리한 끝에 자신의 심중을 글로 적어 벽에 붙였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마음은 거울 같은 것이니/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티끌이 묻지 않도록 하라

그 때에 아직 삭발도 하지 않은 더벅머리 행자가 대중 가운데 숨어 있었다. 혜능이었다. 그는 이미 진리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깨달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깨달음이란 본래 나무가 아니요/거울 또한 대臺가 아니다/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어디에 티끌이 있겠는가

이 두 사람의 게송은 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표현한 깨달음의 경지는 사뭇 다르다. 신수 대사의 가르침은 양자강을 중심하여 북쪽으로 전파되어 성행하게 되었고, 혜능의 가르침은 강남으로 전파되어 성행하게 되었다. 강북으로 간 사상은 몸과 마음을 아직 경계의 대상으로 보았고, 티끌 또한 털어 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부지런히 털고 닦음으로써 티끌이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수행자들에게 조금도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혜능은 대상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나섰다. 깨달음에 무슨 나무가 있고 거울에 무슨 대臺가 있느냐고 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인데 닦고 털고 할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오히려 존재의 실상을 단번에 드러냈다. 북으로 간 사상을 점수漸修라고 하며 남으로 간 사상을 돈오頓悟라고 한다. 여기에서 중국의 모든 남돈북점南頓北漸 사상의 기원이 서게 된 것이다.

독창적인 것만이 선화다
회화에 있어서도 북종화와 남종화를 나누고 있다. 북점의 영향을 받은 북종화의 경우 사물을 나타내려 할 때 붓과 손을 여러 번 움직여 사실적으로 나타내려 노력한다. 가장 사실적寫實的인 그림일수록 성공한 그림이다.
그러나 남돈의 영향을 받은 남종화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사실적이기보다는 그 뜻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자연히 필획의 수가 줄어들고 단순화되어야 한다. 채색이나 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단번에 무엇을 나타내려 한다. 단조롭고 생략적인 것을 격이 높은 것으로 본다. 사물의 외양을 표현하기보다는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는 사의적寫意的인 그림쪽으로 발전했다.
리양카이는 자신이 체득한 돈오를 설명하기 위해 대나무를 쪼개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을 표현하는 인물로 혜능을 선택했다. 신수 대사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으라’는 가르침보다 혜능의 ‘본래 무일물’의 가르침에서 더욱 그 본질에 가까움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림 속의 혜능은 칼을 들어 대나무를 내리치고 있다. 칼을 내리치는 순간적 동작으로 본래무일물이라고 표현한 돈오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다. 칼로 대나무를 쪼개 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빨리 순간적으로 갈라지는지 알 것이다. 대나무는 칼이 지나가는 곳 보다 먼저 빠르게 갈라진다. 갈라지는 대나무는 순간적으로 바르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쫙 갈라지고 만다.
또한 선사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앞사람의 답을 흉내낸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대답이나 마찬가지다. 진정한 선화는 언제나 독창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달마도라 하더라도 앞사람을 흉내낸 것이라면 성공한 선화라고 할 수 없다. 단청하는 장인이 스승의 달마도를 아무리 잘 베껴 그렸더라도 선화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미 죽은 그림이다.
이 그림이 선화로서 살아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점은 주제의 독창적 창안에 있다. 이 그림은 선의 가장 중대한 특징인 돈오를 직접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돈오라는 선가의 깨달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대나무를 쪼개는 것으로 돈오를 표현하려 한 리양카이의 착상은 참으로 기발하고 신선하다. 이전의 그림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그만의 독창적 안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대나무가 시원하게 쫙 갈라지는 느낌이 다소 부족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리치는 혜능과 갈라지는 대나무를 좀더 역동적으로 살려냈더라면 어땠을까? 진정한 선은 정靜 속에서 함몰되어 머물지 않고 동動으로 살아 움직여야 완성되는 것이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