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를 찾아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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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김남희
1993년 05월 135호
꽃소식의 북상보다 먼저 봄향기를 발산하는 곳이 서울의 인사동이다. 지난 겨울 졸업생들의 수줍고 서툴은 작품전이 드문 드문 열리던 화랑가에 겨울 땀을 흘린 인고의 작품들이 앞을 다투어 꽃의 개화보다 먼저 봄을 열고 있다. 달마를 찾는 발길이 향한 곳은 범주스님의 ‘자비의 집 건립을 위한 서화전’이다. 서화와 도자기 작품들이 선보였는데 달마 포대 한산습득을 중심으로 이백오십여 점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먼저 많은 양의 작품이 주는 힘이 파도처럼 가슴 벅차게 밀려오는 느낌이다. 큰 붓으로 시원하게 그려진 그림이 조금은 서양화 기법을 가미하여 스님만의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고, 삶의 희노애락을 겪음하면서 열반락을 향해서 굽힘 없이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구도자의 행열’ 앞에서는 스님의 구도 자세가 보이는 듯하여 저절로 합장이 나왔다. 맨 처음 달마를 찾는 순례의 길을 떠날 때에는 막연하기도 했고, 별반 기대도 하지 않았다. 선화에 대한 나의 짧은 지식으로 우리나라는 중국어나 일본에 견주어 선화의 역사가 풍요롭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도의 곳곳을 다니면서 수행과 작품을 같이하는 스님들이 뜻밖에 많은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범주스님의 달마 또한 기억의 작은 영역에 머물다 문득 커다란 세계의 확장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스님이 사는 곳은 속리산 자락이 줄기줄기 휘몰아가다 끝나는 지점인 산골마을이다. 보은에서 내려 달마선원을 찾으니 차는 충청북도 도계를 따라 한참 달리다가 비포장인 경상북도의 좁은 도로로 들어선다. 속리산 봉우리에 둘러 쌓여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스님의 동네는 전기가 들어 오는 것이 신기할 만치 문명의 그림자가 비껴간 자리이다.
‘달마선원’이란 작은 현판을 외롭게 매단 작은 한옥이 스님의 거소이다. 원래는 절이 많아 절골이라 불렀던 곳인데, 절은 자취도 없고 외딴섬처럼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흙 반 돌 반으로 지어진 토담집에서 노동의 피곤함과 늙음의 외로움이 모두면 노인들 세 가구가 흙처럼 나무처럼 스님과 동네하여 살아가고 있다. 반야라는 예쁜 이름의 강아지가 반기는 품새를 뒤로 하고 스님의 작업실에 들어서니 고졸한 묵향이 가득하다. 짭짤한 작설차를 나누어 마시며 듣는 스님의 선화이야기는 마치 선재동자의 구도의 순례와 같이 느껴진다.
학창 시절 예술에 대한 열망 속에서 예술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찾고자 한 것이 홍익대학교에 입학한 동기였단다. 젊음과 예술론이 함께하는 재학시절이었지만 방황과 번뇌는 끊이지 않았다. 우연히 보게 된 금강경을 통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접하게 되고 여기에서 참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학업을 그만두고 출가했다. 한동안 경전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으나 문자로서는 삶의 해갈을 얻지 못할 것 같아 인천 용화사의 전강선사 문하에서 참선공부를 하게 되었단다. 이로써 참선공부는 스님이 사는 튼튼한 기반이 되었다. 스님에게 부처님과 더불어 달마대사 전강스님 등은 사는 어려움이 있을 때의 영원한 받침대인 것으로 보인다. 스님이 살아 오신 길 가운데 미국에서의 작품 활동과 포교 사업이 인상적이지 싶다. 1981년 전시차 미국에 갔을 때 현지에서 만난 숭산스님의 요청으로 로스엔젤레스의 달마사의 주지를 맡아 그림을 통한 국제 포교에 힘을 기울였다. 그 뒤에 뉴욕의 서호오픈센타에서 미국인들에게 참선과 선화를 지도하기도 했는데, 동양보다 서양에서 선에 대한 관심이 많아 힘든 줄 모르고 정진 할 수 있었다 한다. 1976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로 93년의 이번 전시회까지 이십여 회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여기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불우이웃돕기, 장애자복지 기금, 불교방송건립기금, 자비의 집 건립 등의 모든 전시가 자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스님의 전시회가 이렇게 의미 있는 것에 고맙다는 말을 드리자 스님은 슬몃 미소를 지으지며 조금은 밥 값이나 하려는 것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신다.
스님의 선화에 대한 견해는 직접 수행과 붓을 거친 선승 화승답게 뚜렷하고 명확하다. 수행과 그림이 포교의 의미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완성된 그림이 포교의 방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도단 불입문자의 선을 그림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일반인에게 쉽게 전달 할 수 있는 것이 선화의 의무라는 것이다. 이런 포교를 위해서 스님은 전시 때마다 ‘선의 이해’라는 서문과 함께 달마 포대 한산습득의 인물 소개를 한다. 또 보통 한문으로 쓰여진 화제를 한글로 풀거나, 스님 나름의 정립된 한 말씀을 소책자로 만들어 나누어 준다.
선은 이론이 없는 자리이나 이론으로 접근하려면 수행이 절대 필요하고 선의 경지를 체험한 뒤에는 자유롭고 활달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선화를 하는 것도 그림의 기본을 익힌 뒤에 명예나 지위를 쫓지 말고, 자신을 비워 가며 각자의 무심에 따라 창조적인 선화를 그리라 한다. 시공이 끊어지고, 생각이 멈추어 유심에서 무심의 근본자리로 들어가면 무한대의 세계가 펼쳐지니 누구나 구도하는 자세를 갖고 있으면 그 세계의 표현으로서의 붓은 좋은 벗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스님에게서 선화는 살아가는 여가가 아니라 치열한 자기 정화의 도구요, 구도의 몸짓이 된다. 정신이 헤이해질 때마다 새로 먹을 갈고 붓을 잡으면 흩어진 자리가 퍽 새롭게 정리되고 새 출발의 상큼함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선화란 예술의 영역 자체가 고도의 방법이나 숙련 요구하는 것이라기보다 조금은 서툴고 미숙하더라도 지극한 수행의 벅찬 표현을 기본으로 한 것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그래서 선화에 있어서 기교나 장치는 오히려 그림의 생명감을 죽이는 것이 되는지도 모른다. 비록 한 획을 긋더라도 생명감 있는 필치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붓은 스님에게서 자신을 채찍하는 죽비가 되지 싶다. 스님의 그림에 묻어나는 정진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구도의 그림보다 경제적 풍요를 쫓는 요즘의 화단을 보면서 구도와 보시로써 그림을 그리는 스님의 모습은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범주스님은 지난 날의 번민과 오염이 떨어져 나간 군더더기 없는 편한 얼굴로 다시 와있다. 수행과 포교와 예술을 패러다임으로 하여 정진하는 것은 스님의 말씀과 같이 자신의 구제를 위해 속세를 떠났지만 나와 남을 위해서는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진속불이의 원융의 자리이지 싶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맑은 한마디 한마디가 졸음 속에 죽비를 맞는 것 같이 다시 새로워진다. 스님이 앞장서는 ‘구도의 행렬’ 속에 기꺼이 발걸음을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