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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눈에서 보살의 눈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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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90년 10월 104호
푸른 산 흐르는 물은 나의 참 모습이어니와
밝은 달 맑은 바람이여, 과연 누가 주인인가
본디 「한 물건」도 없다고 쉬이 말하지 말라
툭트인 공간 널려진 존재가 그대로 진리일세.
靑山綠水我眞面 明月淸風誰主人
莫謂本來無一物 塵塵刹刹法王身

위의 시는 무학자초(無學自超)왕사가 스물다섯 살 때 지은 오도송(悟道頌)이다. 무학자초왕사는 고려 충숙왕 14년(서기 1327)에 태어나 조선조 태종 5년(서기1405)에 세상을 든 분으로 79세 동안 중생교화에 힘쓰다 간 고승이다.
격변하는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고려조의 멸망을 아픈 마음으로 지켜보았고, 운명적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조 새시대의 창업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원(元)나라의 침략이 있었고, 그런 영향으로 고려의 왕조와 왕권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졌다. 게다가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침략, 찬탈은 온 국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나갔다. 그런 와중에 불교의 정법 기치를 우뚝 세우고 새시대의 도래를 외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무학왕사 자초였다.
중국은 마침 원에서 명(明)으로 바뀌어가는 격변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정치적 혼란,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혼란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신돈화상을 주축으로 하는 불교계와 유교계의 기득권에 대한 치열한 내분경쟁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시대에 무학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어쩌면 태조 이성계와의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신돈화상에 대한 역사의 왜곡이다. 과연 신돈화상이 사서에 기록한 것처럼 요승이었는가. 고려말에 이르러 특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신돈화상의 출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기득권을 갖고 있던 위정자, 부르주아에게 있어서 봉건적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편승한 신돈을 올바른 눈으로 보아줄 인물은 있을 수가 없었음이 당연하다.
사회경제를 독점하고 있었고, 정치적 권력의 비호 하에서 부른 배를 뚱땅거리며 살아가던 지배계층에게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재산을 몰수하여 노동자 농민들에게 재분배를 요구했던 신돈을 역사가는 타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조의 역사란 것이 왕정의 역사요, 유교우위의 역사였으며, 지배계층을 위주로 한 역사였기 때문이며, 그러한 감독하에서 씌어진 역사 또한, 바른 기록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기록한 자가 프롤레타리아의 무지한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지식층이었다는 데에 있다.
조선조의 역사가 과연 몇 퍼센트나 진실인가. 아니 조선조에 씌어진 불교역사가 얼마나 올바르게 씌어졌는가. 역사학자요 수필가며, 불교의 해석학에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한 일연국존의 저서마저도 깡그리 역사의 이면 속으로 삼켜버리고, 80종이나 되는 많은 저서 가운데서 겨우 「삼국유사」한 가지만을 남겨 둔 조선조 유생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불교를 이해시
켜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식석상에서는 ‘부처’라는 단어만 업에 담아도 온갖 모진 형벌을 감행 해야만하는 그러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신돈화상을 바로 얘기할 수 있었으며, 일연국존의 날카로운 예봉을 살려둘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그러하듯 수필이란 쓰다보면 매우 날카롭게, 사회와 정치권력의 부패와 부조리를 지적하게 된다. 일연국존이 수필가였다면 왕권과 정치인들의 잘못된 점들을 수없이 지적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글들은 도저히 역사 속에 버젓이 살아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자본가, 지주계급에게 부의 재분배를 부르짖고 실제로 왕권을 등에 업고 그러한 엄청난 역사(役事)를 실행에 옮긴 신돈화상을 내버려 둘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설사 신돈회장에 대한 역사가의 말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신돈화상은 또 그런대로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통해, 부패한 고려왕권을 회복하고 새로운 왕조창업을 이룩할 수 있도록 이성계에게 역기능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신돈화상의 얘기는 내가 역사학도가 아니고 또한 특별한 자료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상해 보라. 요즈음처럼 민주주의국가 시대에 있어서도 노동자·농민들이 제할 말을 다 못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데 왕권과 그 왕권의 지배하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치러내며 온갖 아부와 술수들을 다하던 왕정시대이겠는가.
어쨌든 이성계는 신돈화상과 무학왕사의 도옴으로 새로운 왕업을 연다. 이성계는 무학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신돈이 간접적 역할을 하였다면 무학은 직접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신돈은 이성계의 계급, 즉 부르주아지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지만 무학은 이성계에게 동조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출신부터도 신돈화상은 당시로서는 대접을 받을 수 없는 한 사대부의 첩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학왕사는 그의 계보가 화려하다. 박혁거세를 시조로, 고려 문종 때의 박인량이 있고, 박인량의 6대손에 박서장군이 있었으며, 그 뒤로 계속 이어 불옥(佛玉), 지회(智每), 인일(仁一), 무학(無學)으로 계보가 형성되는 명문가의 출신이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지혜롭더라도 가문에 대해 궁지가 없으면 출세할 수 없다. 바보스럽고 팔푼이라도 명문대가의 출신은 쉽게 빛을 보게 된다. 요즈음과 달리 옛날에는 더욱 연줄이 필요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역사에 기록된 고승들은 한결같이 그의 가문이 화려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 아무리 뛰어난 지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매도되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한국고승전」을 읽어보면 요즈음 민주주의 국기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야말로 구역질나는 아부와 친여사상이 군데군데 담겨 있음을 본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킬 수는 없다. 우리는 미래에의 삶을 값지게 하기 위해 오늘을 참되게 살 일이다. 기펴며 살 일이다. 과거의 역사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역사의 거울을 통해 현재의 우리들은 매무새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얼마전 서울, 경기, 강원지방을 강타한 폭우와 홍수만 해도 그렇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참된 눈망울을 가진 당국자였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게 대부분의 명이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미래로 열려 있다. 이 순간 우리들의 들숨날숨도 하나의 역사다.
우리가 무학대사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미래에 대한 역사관이다. 너무 근시안적으로 사물을 본다면 현재의 우리들은 물론이거니와 미래 우리의 후손들에게 얼룩진 역사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만남은 바로 그 자체가 미래를 열어가는 하나의 역사의 장이었다.
어느 날 이성계와 무학이 만나 자리를 함께 하고 정담을 나누던 중 갑자기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내 이제 스님을 뵈니, 마치 도야지(돼지)의 모습처럼 생겼소이다. 허허.”
무학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슬쩍 받아넘긴다.
“내가 보기로 대왕은 보살 그대로이로소이다.”
이성계는 당황하며 물었다.
“아니, 나는 스님을 돼지처럼 생겼다고 했는데 화는 내시지 않고 오히려 나보고 보살처럼 생겼다니 무슨 뜻이라도 있소?”
무학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그러나 매우 자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로 보이고 보살의 눈에는 보살만이 보이는 법이외다.”
이성계의 머리를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다. 둘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긴장이 사라지고 둘은 허리를 굽혀가며 박장대소 하였다. 서로는 통한 것이다. 정치인과 종교인, 왕과 사문은 하나가 된 것이다.
세상은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어떠한 색깔의 안경을 끼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은 달리 보인다. 마음의 안경은 보는 이의 의식을 여러 가지로 구별짓는다. 욕망에 가득찬 이의 마음은 돼지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은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본디 ‘출가(出家)’라는 것이 욕망으로 가득찬 돼지〔豕〕우리〔 〕를 벗어남〔出〕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학대사의 이 일착자(一着子)는 현실을 이해하고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미래의 세계를 설계하는 우리들에게 역사를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을 제공해주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