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산내암자-가야산의 보덕굴 희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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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3년 05월 135호
희랑대希郞臺는 큰절에서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오랜 암자로서,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걸쳐서 생존했던 희랑조사(881-967?)의 원당이었다. 희랑대는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금강산 보덕굴에 비유될 만큼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풍치가 아담하다.
일찍이 실경 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런 <해인사도>에는 희랑대의 특징적인 모습이 나와 있는데 나무 발을 삐죽하게 그려 놓은 것이 퍽 재미있다. 희랑대는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집을 짓고 나무 발을 내려 건물의 일부를 받치고 있는데 그 겉 모앙이 인상적이다. 특히 이른 봄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산벚 꽃 필 무렵 새소리를 따라 극락전 뒷 등성이를 돌아가면 바로 한눈에 들어오는 희랑대의 모습은 골 깊은 산사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윽한 아름다움을 전해 준다. 희랑대의 초창연대는 희랑대사가 생존했던 십세기 초엽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중수한 기록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40년에 현응스님이 중수하였고 1970년에 성허스님이 기와 번와를 했으며 1985년 이래로 보광스님이 주석하면서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도량을 일신하였다.
희랑대는 예부터 나한도량으로 독성님을 모셨는데, 독성님의 영험이 대단하여 기도와 불공을 드리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1940년 현응스님이 희랑대를 중건할 때 터가 옹색하여 암반 위에 2칸 6평으로 계획하였는데, 그 때 도목수였던 이화백의 꿈에 백발의 노송이 나타나 2칸은 너무 적으니 3칸으로 지어 달라고 하여 다시 3칸으로 바꾸어 설계 할 만큼 영험한 기도 도량이다.
특히 초창자인 희랑대는 조사로 추앙될 만큼 뛰어난 인물로, 최치원의 형이었던 화엄학의 대가 현준대사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뒷날 해인사가 고려 태조가 된 왕건의 복전福田이 되고 또한 대사원이 될 만큼 사격寺格이 높아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해인사에서 머물렀던 역대 기라성 같은 스님들 가운데서도 조사라는 칭호로 불리는 분은 오직 희랑스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당시 해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의상 화엄학파는 남악과 북악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는데, 특히 그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대립 양상이 첨예하였다. 북악은 희랑대사와 그 정치 세력으로 왕건을 복전으로 하고 남악은 관혜대사와 후백제의 견훤을 복전으로 하였는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개국함으로써 희랑대사는 왕사 이상의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조사로 추앙 받았을 것으로도 짐작된다.
학문적으로도 북악파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희랑대사를 이어 균여대사와 같은 대화엄의 종장이 화엄 사상을 계승하여 고려 왕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인사는 희랑조사의 목각상이 지금까지 전해 오는데, 표정이나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 단아하여 고승의 숨결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회랑스님 스스로 이 조각상을 만들어 남겼다고 전하지만 조각 수법이 대단히 정교하고 모양새가 아름다운 것으로 보아 당시 최고의 장인의 솜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가지 회랑조사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해인사의 모기는 모조리 희랑대사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실 해인사는 최근 들어 몰려드는 관광객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모기가 서식할 만큼 충분히 오염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부터 삼사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해인사에 모기가 서식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이 가기도 한다. 우선 가야산을 흐르는 물은 한여름에도 들어 갈 수 없을 만큼 차고 급류이다. 여름철에도 날이 궂은 날은 한 겨울에 입는 누더기를 입어야 할 만큼 서늘하며 공기가 맑아서 모기가 서식 할 장소로는 부적합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랑조사 때에도 해인사에는 모기가 분명히 있었고, 이 모기를 가야산에 들여 놓고 살게 한 장본인이 바로 희랑조사라는 것이다.
하필, 전염병이나 전하는 더러운 모기를 들여 놓았을까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 모기는 다름아니라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의 졸음 방지용이었다고 한다. 희랑대사는 특히 한여름 점심밥을 먹고 졸거나 저녁을 먹고 졸고 있는 수좌들의 수마를 모기 보살로 하여금 쫓아 주기 위해 모기를 풀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모기 후손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해인사는 모기 보살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간혹 모기에게 물리면 수좌들은 신경질을 부리기 보다는 오히려 희랑대사의 자비쯤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지만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최근에는 워낙 많이 들이닥치는 피서 인파와 함께 해인사가 아닌 딴 곳의 모기가 유입되어서인지, 모기도 예같지가 않아 요즈음 인심처럼 독하고 모질다는 불평이 있는 것을 보면, 산과 물의 오염과 그 심각성이 마냥 맑기만 했던 기야산에까지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올해도 어김 없이 가야산에는 화창한 봄이 와 있다. 홍류동 계곡의 벚꽃은 지고, 원당암 뒷산의 벚꽃과 희랑대로 가는 길섶의 산벚꽃이 수줍게 피어 있다. 산에서 피는 꽃은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해도 훨씬 맑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점심 공양을 하고 나서 산책 삼아 희랑대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희랑대에서 느끼는 정취는 아무래도 십 년 전만 못하다. 각 암자로 바쁘게 올라가는 자동차와 신작로가 그렇듯이 새로 고쳐 칠한 단청 빛깔이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다. 옛날 희랑스님이 손수 심었다던 바위 위의 소나무는 죽은 지 옛날이라 둘러보아도 그 자취도 찾을 수 없다. 문득, 편리한 문명 속에서 우리들의 따뜻한 정감과 옛 정취가 자꾸만 설 자리를 잃어 가는 듯하여 저녁 햇살 속에 꽃잎을 떨구고 있는 숲을 멀건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