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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정령치 마애불상군-지리산 고개마루의 벼랑에 부처를 새긴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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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3년 05월 135호
이태호, 황호균

지권인을 하지 않은 비로자나불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에서도 지권인智卷印을 하지 않은 비로자나불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의 수인은 지권인뿐이고 지권인을 하고 있으면 모두 비로지나불로만 생각해 왔다. 더구나 중국이나 일본에는 지권인을 하지 않은 비로자나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 불상의 특수성으로 여겨 온 학계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정령치 마애불상이야말로 지권인이 아닌 비화나불 수인의 한 모양새로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비로자나는 석가의 법신불로서 신라 말 구세기 이후 유행한 밀교적 부처상이다.
지리산 정령치 마애불의 존재는 이미 삼십여 년 전 황영수 박사가 「남원 정령치 마애불」이라는 제목으로 ‘속금석유문續金石遺文 (고고미술 자료 제14집, 1963년)에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오 년뒤에 김종태 씨가 더 자세하게 조사하여 「정령치 마애불명문과 정련당비명병서」(고고미술98호, 1968년)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두 학자에 의해 명문과 불상이 암벽에 새겨 있다는 개략적인 정보가 알려져 왔으나 조각이 거칠고 퇴락하여 주목 받지 못했고, 그 위치 또한 워낙 험준한 산악 지대여서 더 이상의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즘에 윤덕향 교수에 의해 다시 조사되어 관심을 환기시켰고, 연구를 심화활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정령치 마애불상군조사보고」, 전라문화 연구 제5집, 1991년) 하지만 불상의 수가 조사자에 다르다. 더구나 남원문화원에서 발행한 「남원의 문화재와 명승」에서는 정령치 마애불이라고 하면서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사진을 뒤집어 싣는 어처구니 없는 사례도 발견된다.
글쓴이는 ‘화순 운주사 불교유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수년 동안 고심하고 있던 차에 정령치 마애불이 고려시대 운주사의 불상과 양식상 같은 계열에 속한다는 윤덕향 교수의 글을 보게 되었다. 그 뒤에 정령치 마애불에 관심을 갖고 1992년 8월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남도 불교 문화 연구회원들과 함께 조사하였다. 이 조사를 통해 암벽에 새긴 부처가 열한분임을 확인하였고 더 많은 명문을 판독하게 되었다.(황호균, 근간예정)
불상과 명문의 수를 조사자 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사연대 조사자 불상 명문
1963년 황수영 8분 불상에 대한 설명 없음 1지역 4자
1968년 김종태 10분 불상에 대한 설명 없음 3지역 46자와 판독불능 12자
1991년 윤덕향 9분 불상에 대한 설명 없음 2지역 10자
1992년 황호균 11분 불상에 대한 설명 없음 3지역 52자와 판독불능 10자

마한의 정장군과 황장군 초상이라는 설화도 있어
행정구역상 정령치 마애불상군은 남원군 산내면 덕동리 산2I5번지에 속한다. 정령치는 지금에는 포장도로를 따라 쉽게 가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등 산길이나 심마니들이 다니는 좁은 산길이었다. 이 산길을 5.16 뒤에 군사 작전 목적으로 이차선 너비로 뚫었는데 그 뒤에 지리산 국립 공원의 관광도로로 포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남원 문봉의 육모정에서 정령치를 지나면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심원을 지나 시암재를 경유하여 천은사로, 또 하나는 달궁을 거쳐 실상사(심원계곡)로 가는 쪽이다. 정령치는 해발 1,140미터 지점쯤의 고갯마루이며 근처에 차량 사고 방지를 위한 조그마한 주차장 겸 휴게소가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약 1킬로 미터쯤 가면 해발 1304미터의 고리봉 남쪽 구부 능선쯤에 돌출된 암벽이 나오고 이곳에 마애불장군이 있다.
마애불상군의 북쪽은 만복대에서 고리봉을 지나 세걸산 바래봉으로, 남쪽은 노고단, 반야봉, 토끼봉, 명선봉, 삼정산으로 능선이 이어진다. 마치 병풍으로 둘러쳐진 듯 아늑한 곳이다. 그 아래에는 비스듬한 명지와 생이 있고 절터의 흔적이 보인다. 지표의 건물지가 눈에 띠지는 않으나 기와, 도자기, 토기 조각을 주울 수 있으며 적석 2열이 확인되었다. 배수 시설로 추정되나 자세한 것은 발굴해 보아야 알 일이다. 아무튼 우리니라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장의 종조격인 신라 말 도선의 창건설(개령암)이 있을 만큼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이처럼 정령치는 남원 운봉에서 지리산에 접근하는 관문격으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오고 기던 고갯마루이다. 구전이나 남원지에 따르면 정령치는 마한의 성터가 있던 원래의 달궁으로, 이 마애불은 마한을 수호하던 정장군과 황장군의 초상이라고 전해 온다. 정령치는 바로 정장군이 지키던 곳리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이러한 설화와 기록이 어떤 연유에서 형성되었는지는 알려진 게 없지만 지리산에 숨어든 마한의 후예들의 한이 담겨진 설화가 아닐까.
정령치 마애불장군은 비위로 이루어진 고리봉에서 암반이 내려오다 뚝 끊긴 곳에 자리한다. 그 아래는 평평한 대지가 넓게 자리하고 있어 절터로서의 여건을 갖추었고 비탈진 계곡이 달궁 마을로 이어진다. 화산락응 회암으로 이루어진 암반면은 풍마가 심하여 거칠고 십도 쯤 뒷 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마애불은 동쪽으로 이십 도쯤 기울어진 남동향으로, 7미터 정도 높이의 암벽 벼랑에 비교적 깊은 선각 부조로 조각되었다. 또 이 마애불상군은 벼랑면의 요철 부분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잘 다듬지 않은 채 조각하였고, 암벽은 비바람에 부서지기 쉬운 석질이어서 형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름대로 상호는 얕은 돋을 새김으로, 의습은 도식적인 선새김으로 처리하여 거친 맛을 조화시켜 내었다.

고리봉 남쪽 벼랑에 새겨진 후백제의 명문과 부처
마애불로 새겨진 열한 분의 부처들은 크게 보아 네 개의 무더기로 나누어진다. 세 부처가 마치 삼존불처럼 보이는 세 개의 불상군과 두 대형 불상을 새긴 불상군이 그것이다. 벼랑 전체면은 이 불상군의 주존으로 보이는 두 대형 불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주변에 작은 불상을 두었다. 두 대형 불상은 암벽면을 어느 정도 다듬어서 새겼다. 특히 대형 불상은 좌측면에 명호를 선각하였다. 이 가운데에 오른쪽 손바닥을 왼쪽 가슴에 얹고 왼쪽 손바닥을 명치쯤에 대고 있는 모습의 좌불은 ‘비로자나불’이라는 명문이 뚜렷하다. 두광이 새겨진 도포식 수인의 입상에는 세?명월지불世?明月智佛 이라 쓰여 있다. 이 대형 불상군의 좌, 우측에 각기 소형 불상군을 새기는 형태로 얼핏 사방불을 연상케 한다. 이 부처들의 크기는 대형 부처가 입상의 경우 4.2미터 높이이고 좌상의 경우 3미터 가량이다. 나머지 세 불상군의 부처 높이는 40센티미터에서 1미터 안팎의 높이이다.
이 정령치 마애불의 도장을 살펴 보면 전체적으로 대형 입상과 좌장을 제외하고는 이마의 백호가 생략되고 오른손을 배나 가슴에 댄 채 왼손이 표현 되지 않는 등 정형의 부처상 격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몸에 비하여 머리가 큰데다 두툼한 입술에 큰 눈의 무덤덤한 표정과 간결한 의습 처리에는 토속미가 물씬하다. 특히 대형 마애불은 보기에 부처라기보다 설화가 전하는 것처럼 거대한 힘을 지닌 장수상의 느낌을 준다.
이들 마애불상군의 암벽면에는 명문이 세 곳에 있다. 두 곳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대형 입상과 좌상의 왼편 어깨쯤에 각기 불상의 명호를 새기고 있다. 나머지 한 곳은 대형 좌상의 아래로 5미터 지점과 대형 입상에서 남서쪽으로 10여 미터 지점쯤에 서로 교차한 곳의 암벽 상단에 위치해 있다. 글씨는 대체로 세로 방향의 해서체 선각이다. 그 낱낱의 크기는 사방 25센티미터 정도이다.
우선 대형 입상의 왼편 목 부분에서 팔꿈치 부분까지 새긴 명문은 부처의 이름일 것인데 제?명월지불世?明月智佛로 판독된다. 이는 비로자나와 함께 밀교의 부처로 생각되는데 불명경을 뒤져 보았으나 여기에 부합되는 부처의 정확한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눈 밝은 선지식의 가르침을 기대한다.
다음으로 대형 좌상의 왼편에는 두 곳의 명문에 보인다. 한 지역은 대형 좌상 왼편 옆의 명치 부근에서 무릎 아래까지이고 다른 한 지역은 대형 좌상 왼편 무릎 아래에 위치한 소형 좌상 왼쪽 옆에 새겨져 있다. 이는 ‘毘盧遮邦佛/世田小?’ ‘?天寶十?/師士田??’으로 판독하였다. 이 가운데에 ‘천보’는 제작 시기를 밝힌 것으로 추정된다. 천보라는 연호의 사용은 당唐(742-755), 오월吳越(908-923), 남한南漢(958)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당은 너무 빠르고 남한은 그 연호를 일 년만 사용하고 말았다. 이 둘을 제외하면 오월이 남는다. 오월의 ‘천보 10년’(917)은 후백제 견훤26년에 해당한다.
남원 용담사의 석불과 탑이 운주사의 불적과 형식상 유사한 점이나 남원 지역과 견훤의 관계 등을 생각해 보면 앞의 연대를 제작시기로 볼 수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이르다. 아무튼 이를 일단 수긍한다면 현재 몇 안 되는 후백제의 불적으로 주목해서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더구나 왕건 세력에게 쫓기고 개성 정권이 선 뒤에 철저히 유린당한 후백제 사람들의 염원이 그토록 장대한 부처를 새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천불을 염원한 개령암지의 마애불인가?
마지막으로 대형 조상의 남서 암벽에 위치한 명문은 “千佛?滅罪陀羅//女他惡?普魯?伽惡?普/卑??阿明伽曰?和帝比/是???白阿衍/他伽/?提?詞”로 판독 된다. 이는 죄를 사멸해 달라며 천불을 조성하는 염원을 담은 글로 보여지며 천불신앙의 유행상을 입증할 만한 우리나라 다불신앙多佛信仰 중요한 증거로 파악된다. 곧 정령치 마애불상군은 명문과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천불신앙을 바탕으로 한 예배지라 생각되며, 이는 지난 호에 살펴본 화순 운주사의 고려 석불과 비슷한 양성이다. 부처의 토속적 형식미로 볼 때에도 쌍벽을 이룬다. 특히 소매 안으로 양손을 끼고 있는 도포식 수인은 화순 운주사 석불에서 찾을 수 있는 도상이다. 또 이 도상은 부안 용화사 석불입상, 곡성 죽산리 석불입상, 장수 원흥사 석불입상, 남원 용담사 석불입상, 영암 월출산 마애불입상, 경북 영천 은해사 거조암 석조나한상 등의 고려 시대 불적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정령치와 가까운 사찰인 구례 천은사에는 필사본 ‘湖左南原府智異山甘露寺(泉隱寺)事蹟’이라는 사적기가 전하는데, 그 기록 가운데에 정령치 마애불의 절 이름에 근사한 것으로 도선이 창건했다는 개령암開嶺庵이 있다. 이를 정령치에 있던 암자로 보고 최근 보물로 지정할 때는 ‘정령치 마애불상군’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보물 1123호,1992)으로 확정하였다. 그런데 사적기의 어느 부분에도 개령암지로 확증할 만한 구체적인 기사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리산 정령치 마애불상군에 대한 조성 배경을 살펴 보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열한 분의 마애불상이 과연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인가 또는 세 지역에 새겨진 명문과 불상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현상적으로 풀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우선 대형불 입상과 좌상이 암벽 전면에 조성되고 그 빈틈을 이용해서 소형불 아홉 분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대형불과 소형 협시불의 암벽 배치 방식이 도저히 한꺼번에 계획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삼존불로 제작하려면 구태여 주존불을 그리 크게 만들어 놓고 모서리에 소형불을 이처럼 궁색하게 만들어 협시불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대형 불상의 좌, 우측에 있는 석불군은 소형불들로만 이루어졌고 비슷한 크기와 형식을 가진 불상들을 새기는 암벽 구성을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형 불상군과 일정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대체로 정령치 마애불상군은 대형 불상 두 분이 먼저 만들어지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소형 불상 아홉분이 조성되었을 것이며, 명문은 대형불이 만들어지는 시기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토속적인 형식미의 다불신앙 유적지
이 정령치 마애불이 있는 지리산은 우리나라의 신성한 오악五岳 가운데의 명소이다. 백제와 고구려 왕권을 패퇴시키고 남한 지역을 장악한 경주 세력에게 지리산은 그 승리의 힘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신라의 왕권과 귀족은 그 지리산에 국가적 사업으로 화엄종의 장대한 원찰인 화엄사를 세웠고, 신라 말에는 새로이 성장한 지방 호족의 옹호를 받으면서 선종의 실상사가 번창하였다. 마찬가지로 신라말의 연곡사, 쌍계사, 천은사 등도 그 사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들 지리산 자락의 사찰에 비하여 정령치 마애불장군은 위세롭지 못하고 못생겼다. 그 거칠고 정형을 깨뜨린 파격의 형식미는 고려 시대 지방 토호 세력이 조성한 다른 부처들과 어깨를 겨룬다. 민간 설화에 담겨 전하는 것처럼 백제에 밀려난 마한, 신라에 점령된 백제, 고려 정권에 짓 밟힌 후백제 유민의 한과 저항 의식이 실려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려 시대 여타의 부처들보다 정령치 부처가 무뚝뚝하면서도 더 친근감이 난다. 그 이유는 무속적인 장군형이면서도 고개를 넘나들며 소원을 빌었을, 산사람이 된 후예들의 소박한 심성이 읽혀지기 때문일 것이다. 매끄럽게 조각할 수 없는 암벽이지만 형편대로 불상을 새겨 모시고 산행의 안녕을 빌며 요량껏 약초 담은 걸망으로 시주하여도 싫다는 내색을 않는 그런 수더분한 부처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