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향이의 초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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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도윤
1993년 05월 135호
이즈음의 계룡은 꽃만 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 저마다 향기를 뿜어내 계룡에 커다란 한 송이 향기 짙은 꽃마냥, 그리하여 시방법계에 가득하신 법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인 듯합니다. 향을 쌓던 종이엔 향내가 배이고, 생선을 엮었던 새끼에선 비린내가 배이듯, 이 신선한 향취 속에 머무는 제게도 향취가 배인 듯하구요.
가파른 언덕길 앙증스런 풀꽃에 취한 듯 앉아 있는 한 스님의 등뒤로 봄 햇살의 따스한 눈길이 머물고 있습니다. 왠지 그 아름다운 정경에 슬몃 눈물이 맺힙니다. 풍요로운 봄날의 잔치에 궁상스런 눈물에 객적긴 하지만,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나 그리움이 늘 있습니다. 그 루선의 자극을 타고 문득 스님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어느 도량에 머물던지 사대가 강하고 육근이 청청함이 제일인데 어떠하신지요.
어제는 우리 절 대중 스님네가 모두 큰방에 모여 ‘연등 울력’을 하였습니다. 잿빛 치의緇衣에 묻혀 사는 우리들에게 큰방에 가득 진달래 개나리 빛 연잎을 들여 놓으니, 큰방이 금새 화사해집니다. 한잎 한잎 꽃잎을 피워 내듯 연잎을 붙이며 오기는 얘기도 손끝에 물든 분홍빛만큼이나 화사하답니다. 소녀 적에 손톱에 물들이던 봉숭아 빛 꽃물이 든 합장한 손에서는 가슴 밑에서부터 솟아 나는 잔잔한 설레임이 보입니다. 아직도 이런 가슴이 있는가 싶어 쑥스럽고 한켠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예쁘게 간직하고 싶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돌아 오는 부처님 오신 날이고 그날이면 으레 밝혀질 등불이지만 부처님 오신 날을 장엄할 등불이 등의 크기에 비례하는 공양금이 오가는 것이나, 좋은 자리 차지하기, 내 등 찾기에 아우성인 초파일 풍경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루를 피고 질 연꽃이고 하루를 밝히고 스러질 연등이지만 기쁨과 간곡한 정성으로 밝혀질 등불이라 믿기에 기쁨으로 빚어 내는 ‘연등 울력’입니다. 그러나 가슴 밑 명치께에 얹힌 듯 묵지근한 체증을 느끼며 답답함에 투정하듯 스님을 향해 얘기자락을 늘어 놓습니다.
동학의 작은 향기 ‘세향이’ 이야기입니다.
세향이는 동학사 불서각을 운영하는 강기사님 내외의 다섯 살 반 꼬마 아가씨입니다. 강사 스님께서 “세간의 향기가 되라”고 지어 주신 이름이랍니다. 그 이름처럼 아직 세간의 향기는 못 되어도 동학의 작은 향기인 동학 대중의 한 식구이지요. 제가 입학했을 때만 해도 궁둥이에 한 보따리 기저귀를 차고 아기오리처럼 뒤뚱뒤뚱 거침없이 어간 문을 드나들던 세향이가 벌써 다섯 살이랍니다. 대중스님들 속에서 살다시피 한 탓인지 목탁 치고 요령 흔드는 것을 장난감 삼아 즐기고 때로는 “띠님 띠님 차 마시자”하며 책상다리 하고 앉아서 작설을 홀짝홀짝 마시기도 해서 전생에 분명 스님이었지 합니다. 앙증맞은 아가씨죠. 말보다도 먼저 배운 합장인사로 궁둥이를 하늘 높이 쳐들고 절하는 모습은 꽃 중에도 제일은 사람 꽃이라던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작년에는 대중 삭발일에 큰방에 들어와 대중스님들 삭발하는 걸 가만히 바라 보더니 자기도 스님들처럼 머리 깎아 달라고 졸라대기도 해서, 엄마와 아빠 허락을 받아와야 한다니까 녀석이 금새 허락을 받아 가지고 머리를 디미는 것이었죠. 평소 신심이 돈독하고 스님들을 좋아하던 그들 부부는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허락을 했던 거죠. 파르라니 삭발하고 앙증맞은 승복까지 맞춰 입으니 그날로 ‘삭발염의 강행자’로 불리웠습니다.
이제는 다시 머리를 길러서 ‘강보살’로 불리 우는 세향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아랫마을 유치원에 입학해서 한동안은 세향이 얼굴 보기가 어려웠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동학사로의 출근(?)을 재개했습니다. 까닭은 이러했습니다. 이교도인 유치원 선생님이 합장인사를 못하게 하고 간식 시간이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가르쳐 공양 시간이면 합장 대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스님들을 보아도 피하거나 합장인사는 하지 않으려 들어서 엄마와 갈등이 심했고 드디어는 유치원 중퇴로 결말 난 것이었습니다. 동학사에도 포교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 있기는 하지만 대전 시내에 있어서 세향이가 다닐 수는 없고 달리 방도가 없었던 거지요. 세향이는 너무나 유치원을 재미있어 하고 유치원 다니는 걸 자랑스러워 했지요. 그 얘기를 들은 대중스님들은 안스러움과 착잡함에, 더구나 유치원 다니는 것을 모두 잊은 듯 맑디 맑게 웃는 녀석의 웃음에 안스러움이 더했습니다. 게다가 들리는 소식은 ‘군법당 내 훼불사건’ ‘청와대의 찬송가 소식’ 등은 비단 몇몇 이교도의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 만은 없는 일이라서 그 답답함이 더한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부처님 오신 뜻이 이 땅과 현실에서는 어떤 의미인가,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지요. 아시다시피 제 서 있는 자리를 비추어 살펴보라는 말인데, 대중처소에서는 더욱 강조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을 신고 벗음에도 뒤돌아보고 가지런한지 반듯하게 놓였는지를 살피는 것이 어느덧 습이 되었지만, 정작 내가 사는 모습과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성찰로서의 ‘조고각하’는 되지 못하는 것이 흡사 더듬이가 둔해진 곤충이 피부에 위험이 닥치고서야 느끼는 것처럼 이미 위험에 직면한 뒤에야 대처하기에 급급한 현실입니다. 아이를 둔 부모라면 한번씩 경험하는 유치원 입학 때의 망설임과, 요즈음 공공연하게 청와대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가와 그에 힘입어서 행해지는 훼불사건 등은 부처님 오신 날 밝혀질 등불 아래서 온몸을 벌거벗은 듯 부끄럽고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이며 불교의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번 부처님 오신 날 장엄하게 밝혀질 등불 아래에서는 가리움 없이 부끄러움 모두 드러내고, 이 땅의 승가와 내 모습을 비추고 돌아보는 냉철한 자기 반성과 진단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해야 삼천 년 전 나투시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빛바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나투실 부처님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치끝의 아픔은 그 아래에서 다시금 소화 기능이 살아나겠지요. 그날 세향이는 여느 때보다, 맑은 꽃보다 더 해사한 웃음으로 맘껏 뛰어 다니겠지요. 부처님은 그런 웃음 속으로 오시는 것 아닐까요 계룡의 향기를 동봉하오니 거두시고 누리심은 스님의 일입니다. 눈이 녹아내리듯 벗꽃은 스러졌지만 따뜻한 잎새들이 솟아납니다.
세향이의 미소와 함께 멀리 하늘가에 눈길 한번 주고 합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