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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아침에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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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서동석 1993년 05월 135호
아직 채 이 년이 안된 재작년 겨울, 집 앞으로 소방도로가 나는 덕분에 조그마한 자투리 땅을 얻게 되었다. 개인 소유의 땅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집 앞이라는 기득권이 미치는 곳이라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두 평 남짓한 땅을 우리가 쓸 수 있게 되었다. 횡재라면 횡재라고 할 수 있는 이 땅에 지난해 이맘때쯤에 작은 전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 나무는 우리 집에 세든 이가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가져왔다가 버린 나무인데 공사장의 한 구석에 내팽쳐져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어 집 앞 자투리 땅에 심었다. 그때가 꼭 일 년 전이다. 사실 정성껏 옮겨 심기는 했지만 그 나무가 소생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한겨울에 내동댕이쳐진 상태로 있었는데다가 뿌리 상태도 여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앞이 허전 하기도 했거니와 어린 딸아이의 교육장으로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딸아이 생일날인 작년 4월 18일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함께 심어 주었다.
그렇게 심어 놓은 나무가 옹근 일 년 만에 새봄을 맞아 연한 녹색의 잎을 내 밀었다. 바싹 마른 상태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죽었나 보다 했는데, 고양이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봄의 기운을 받아 마른 나무 가지에서 지난 겨울이 주는 역경의 몸살을 거뜬하게 이겨 내고 살아있음을 당당히 보여준다. 우리가족이 기울인 정성도 있기에 나무가 이겨 낸 역경은 아침 저녁으로 우리 가족의 화제가 되었다. 누구보다 어머님이 좋아하셨다.
“참으로 대견하지. 사람은 그 정도였다면 도저히 살아나지 못하였을 터인데”
봄의 햇살은 소생의 기운을 천지에 가득하게 한다. 감옥에 있을 때는 따사로운 봄볕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봄 햇살에 어쩌다 높은 담장 저 밖에서 어린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함께 묻어 오기라도 하면 지긋이 눈을 감고 기분 좋은 감상에 빠진다. 비늘처럼 찔러 오던 마룻장의 한기가 감방의 작은 창으로 타고 드는 햇살에 누그러들고 어린아이들이 꾸밈없이 떠드는 소리가 높은 흰 담장을 넘어오는데 누구라 푸근한 마음이 안 들겠나. 집 앞의 나무가 소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감옥에서 보았던 그 따사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봄 기운이 갖고 있는 소생의 힘은 사람들에게도 다른 계절과 달리 무언가 하려는 의지를 북돋운다. 연례 행사처럼 이맘때에는 영락없이 시위의 대열이 거리와 공장, 학원가를 ‘가열차게’ 만들곤 하였다. 그것이 극심할 경우 스스로 몸에 가연성 연료를 붓고 불을 당겨 몸을 사르는 ‘조신공양’도 서슴치 않았다. 진압하는 측의 폭력으로 소중한 생명을 잃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났었다. 고문으로, 최루탄으로, 곤봉으로 4월과 5월의 햇살을 서럽게 하여 왔다. 삶에의 의지가 얼은 땅을 헤치고 올라오는 소생의 기운처럼 활짝 펼치려는 데 대하여 잘못된 권력에의 집착은 죽임을 불렀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은 몇 십 년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업처럼 번복되어 왔다.
마침 그러한 때에 무슨 숙업인지 부처님 오산 날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 분의 오신 날을 기리는 제등행렬의 대열에도 때때로 죽음의 폭력이 쏟아지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것은 적대적인 대립의 극치였다. 목숨 있는 일체의 존재가 존귀하다고 하선 분이 오신 날을 기리기 위한 모임에 죽음의 폭력이 퍼부어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이 땅이 얼마나 모순 속에서 살고 있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계절도 계절이려니와 부처님이 이 사바세계에 나투시면서 하신 일성은 다름 아니라 억눌린 삶의 해방, 곧 죽음으로부터 소생하는 생명의 선언에 다름 아니다. 아마 부처님이 이 계절이 아닌 한 겨울에 오셨더라도 당신의 목적에는 변함이 없을 터이지만 마침 이 계절에 오셔서 그 분의 뜻은 더욱 살아오는 것이다. 죽은 듯한 나무에서 연초록색의 새순이 돋는 자연과 “하늘의 위와 아래에 오직 나(실존적 해석으로서의 자기가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총체)만이 존귀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고통을 마땅히 가라 앉히리라”는 인간의 선언이 갖는 조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셋말로 ‘환상의 단짝’ 이라 하면 지나친 농이 되려나.
그랬다.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낸 조화의 극치는 이제 인간과 인간, 정확한 사회 과학적 용어로 환원하여 계급과 계급간의 모순으로 인한 대립의 극치로 바뀌었다. 그것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르고 있으며 모름지기 미래에도 당분간은 지속되리라 생각된다. 계급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인간과 인간의 대립은 끊임 없을 것이 뻔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선언하신 약속은 거짓인가 과거, 현재의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고 미래의 희망을 보여준다 하신 약속은 어찌된 것인가 의심할 바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살아계신 동안 한번도 당신의 선언을 잊지 않고 실천하셨다. 그리고 무여열반에 드신 뒤에는 말씀으로써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침을 주고 계시다. 그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말할 것도 없이 경전에 담겨 있다. 나는 단언하건대 많은 경전에 담김 내용은 ‘인권의 지침서’로서 충분하다고 본다. 마치 수많은 강줄기가 결국에는 바다로 모여 하나 되듯이 말이다.
당신이 열반에 드신 지 이천 오백 여 년이 지난 뒤 여러 모순이 중첩된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부처님의 말씀과 실천은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감옥에서 나온 뒤에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포교원의 중, 고등부 학생법회를 맡아보고 있는데, 덕분에 부처님 말씀에 대한 공부를 다시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좀 비중있게 들려 주는 내용은 부처님의 실천적인 모습이다. 특히 가장 낮은 신분에 의해 억압 받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어떻게 다가가셨는지를 강조한다. 이를테면 똥지게꾼 ‘니이다이’와 함께 강물에 들어가셔서 손수 니이다이의 몸을 씻어 주시는 모습은 수시로 반복하여 들려 준다. 덧붙여서 부처님이 이 사바세계에 오심은 바로 부정을 통한 긍정에로의 나아감이라는 해석을 달면서.
아직 어린 학생들이 내가 뜻하는 바를 충실하게 알아차리는지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내 나름대로 알기 쉽게 각색하여 전달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긴 하직만 부처님이 인간세계에 오신 의미를 ‘부정과 긍정’으로 해석하는 주관이 잘못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전생에서 현생으로 오신 과정이 그러하며 현실에서의 모든 실천과 말씀이 그러하며, 열반에 드시는 순간이 역시 부정을 통한 절대적 긍정을 보이신 모습이다.
기존 사회의 억압 질서에 대한 강력한 부정을 통해 참생명체로서의 긍정을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 속의 인간성 구현의 선언이겠다. 따라서 부처님이 오셨음은 인간 권리에 대한 확인이라고 단정 할 수 있다.
다만 이천오백여 년 전의 상황과 현재의 그것에는 큰 차이가 있겠다. 더욱 이 요즘처럼 정세의 순환이 빠른 시기에 부처님 말씀을 과거와 다름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부처님의 말씀을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작업도 따지고 보면 ‘정을 통한 긍정’의 일환이다. 이를테면 계율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오늘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안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일이 그러하겠다. 생명 있는 일체의 존재를 죽이지 말라 하신 엄한 지침은 이제 자연파괴 문제나 인권 보호 같은 문제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나는 또 한번 맞이 하는 부처님 오신 날에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살림살이와 당신이 일러 주산 말씀의 올바른 적용에 대해 고민한다. 예전에는 노골적인 폭압통치로 인해 인간의 권리가 폭 넓게 받아들여질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 시절에 인권운동은 무엇인가 개량적 냄새가 나는 듯하여 뒷전에 두고자 했다. 그러나 정작 개량의 물결이 압도하는 현실의 변화에서 오히려 부처님이 오신 진정한 의미는 더욱 부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학살과 폭력이 난무하던 ‘잔인한 시대’에서 님의 말씀은 그에 대응하는 살벌한 구호로 받아들여졌지만 혁명을 먼 이상으로 전락시킨 ‘시대의 잔인함’에서야말로 잔잔한 인간의 밀쯤으로 되살아남을 알게 된다.
눈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한 자투리 땅의 나무 한 그루가 한 해 동안 앓아 온 투병의 교훈은 오늘 다시금 참 인간의 소리로, 내게 다가오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더욱 고맙기만 하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 아침에는 진정 소생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