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겉돌았다. 막연하지만 분명히 있긴 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없는 것 같았다. 대여섯살 때 기억인데 시골친척집엘 가게 되면 기차에서 내려 꽤나 먼 곳까지 걸어야 했다. 다리가 아파서 울먹울먹 해도 누구도 업어 주지를 않았다. 길들여 왔던지 내 칭얼거림이 깊지 못하고 눈치만 보며 고통스러워했다. 집으로 올 때 역까지 친척 아저씨가 업어다 주었는데 그 따뜻한 등에 내 작은 가슴이 편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일곱 살이 되면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도 서둘러 주질 않았다. 여덟살이 되어 동네 사람이 흉을 봐서 마지 못해 학교 선생님인 옆집 처녀를 따라 학교엘 갔다. 그러나 퇴짜다. 호적등본 대신 기류계寄留屆 초본이라는 것을 갖고 갔는데 정작 내 이름이 없다.
그럭저럭 지나셔 오월이 되어 ‘상동 교회’가 운명하는 유치원엘 갔다. 서류도 필요 없다. 이름은 집에서 부르던 ‘유끼’로 내가 우겼다. 그런데 항렬이라는 것이 있을께다 하면서 선생님이 잘 알아와라’ 했다. 아버지께서 환煥돌림이니 성환이라고 불러 주셨다.
흰 천을 접어 윗저고리에 핀을 꽂고 내 이름표를 달았다. 그러나 ‘유끼’가 아닌 낯설은 정환 이를 선생님이 부르다 부르다 내쪽으로 와서 그 예쁜 손가락을 코앞에 가리킬 때에야 ‘예’ 하고 대답했다
어쨋든 나는 나서 처음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더욱이 천사 같은 선생님이 예뻐해 주고 볼을 만져 주고 하니 너무 좋았다. 오전에 끝나지만 상관도 없이 하루 종일 유치원에서 놀았다. 선생님을 쫓아다녔다. 하여간 선생님이 하라는 숙제 같은 것을 빠지지 않고 잘 해 갔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우개도 선물 주시고 ‘왕눈깔’ 사탕도 주셨다. 나는 유치원이 좋았다.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러나 정확히 오십여 일만에 그것도 종쳤다. 전쟁이 났단다. 유치원엘 가지 말란다. 나를 학교로, 유치원으로 데리고 가 주던 옆집 처녀가 ‘붉은기’를 준비하란다. 해방군이 오면 환영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날 나의 아버지는 심각하게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그날 밤 자고 나서 아버지는 없어지셨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옆집 처녀 선생님과 함께 공화당엘 나갔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고 우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역사..” 노래를 크게 잘 부르면 ‘왕눈깔’ 사탕을 주곤 했다.
꽤나 재미있어 할 무렵, 어느 날 밤에 어머니는 내 동생을 업고 나를 끌고 어디론가 갔다. 아마도 마포강가가 아닌가 생각되는 강둑 뒤 풀숲에 몇 시간 있는데 어떻게나 모기가 무는지 차라리 강물 속에 들어가겠다고 칭얼대는 나 때문에 숨어 있던 사림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중으로 큰 돛배를 타고 도강을 하여 도착한 곳이 김포였던 것 같다. 어느 집 문간방을 임시 거처로 피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인민군 부대가 근방에 있는지 군인투성이다. 하필 피난을 부대 근방으로 왔으니 꼼짝없이 잡혀 버렸다.
어느 부자집을 접수했는지 쌀 배급을 준다기에 몇 번씩 새치기를 해서 제법 많은 식량을 얻어 오니 어머니가 “잘했다” 칭찬하셨다. 인민군장교하나가 나를 귀여워해 주었다. 나야 예뻐만 해 주면 금방 친해진다. 부대에 들어가 밥도 먹고 노래 한 자락 하라고 하면 인민군들 박수치는 중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댔는데 좋아라 소리를 쳤다.
남쪽으로, 해방시키려고 부대가 이동하는 통에 속절없이 굶게 생겼다. 물어물어 용인에 있는 고모집으로 우리 세 식구는 찾아갔다. 곧 인민군이 물러나고 국군이 온다고 소문이 나는가 했더니 어느 날 세상이 온통 아비규환이라 전쟁의 마당 한복판이었다. 밤새 콩볶듯 하고 날아온 파편이 우물에 떨어지면 ‘지글지글’ 끓었다. 우린 방안에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다. 국군보다 미군이 먼저 들어왔다. 우린 태극기를 흔들고 환영했다. 그날 밤 미군들이 ‘여자사냥’을 나와서 동네는 온통 쑥밭이 되었다. 젊은 아녀자들이 그랬듯이 우리 어머니도 아궁이 검정을 온통 얼굴에 칠하고 밤낮을 숨어 다녔다.
얼마 후 ‘방위군병’ 옷을 입고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가 어떤 아저씨랑 오셨다. 그 아저씨가 내게 군인용 스텐 스푼을 주었는데 오랫동안 간직했었다.
어느 날 경찰관 하시는 큰아버지가 오셨다. “내가 키우마” 하면서 나를 데리고 충북 증평엘 갔다. 나를 중간에 두고 아래 위로 누이가 있었는데, 큰어머님이랑 어떻게나 나를 미워하는지, 특히 소풍갈 때 싸 가는 김밥이랑 과자를 보면 금방 표시가 난다. 그곳에서 국민학교 삼학년으로 편입했다. 알로 까진 서울 머슴애가 어리숙한 시골아이들보다 훨씬 돋보여서 연극도 하고 공부도 꽤 해서 금방 반장이 되었다.
그것도 몇 개월 못간 어느 날 밤 문득 잠이 깨어 잠결에 들으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다투고 계셨다. 아들을 못난 죄인 어쩌구 저쩌구 성환이가 어쩌구 저쩌구.
그 다음날 나는 그 집을 도망 나왔다. 잘 보살펴 주던 담임선생님, ‘조’선생님께서 버스를 태워 주셨다. 용인엘 갔다. 그러나 벌써 아버지 어머니는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서울엔 아직 차편이 개통되지 않았다. 영락없이 나무 하고 풀 베고, 새 쫓고 그리고 수수풀떼기를 먹어야 했다. 피골이 상접된 아홉살 어린 나는 들판에 나가 몹시도 울었다. 외롭고 슬프고 그렇게 내동댕이 처져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를 만나서 반갑다기보다는 같이 시오리 긴 신작로를 걸어 시골장에 가서 국밥 한 그릇 먹은 것이 더욱 마음에 남았다.
서울에서의 삶은 비참했다. 문득 세상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허구헌날 술에 취해 계셨다. 이것저것 장사라도 하신다고 해서 가끔 가보면 가게에 계신 것 보다 술집에 계시는 일이 더 많았다. 때론 안주로 지시는 소 창자구이를 내게도 주셔서 먹었다.
나의 어버지와 어머니는 되도록 나를 자식이 아닌 듯 애써 외면하셨다. 자식 있음을 부끄러워하시는 것이 내 어린 눈으로도 역력해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술 취해 있는 동안은 내게 ‘구구단’도 물어 주셨고 때론 내 머리를 지긋이 눌러 주시곤 했다. 술취하시면 이세상 사람이 아니시구나 생각했다. 곧 잘 다른 장사꾼과 자리 다툼인지 싸움을 하셨는데, 술 자시고 하는 싸움이라 내가 봐도 뻔하다. 맨날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신다. 그리고 집에 오셔서는 섧게 우신다. 술이 깨실 무렵이 되면 더욱 상념을 피하시는 듯 어떤 일에 몰입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사는 데는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남대문 시장에 큰불이 났다. 나와 어머니가 가게엘 뛰어갔다. 여기저기 불길과 연기로, 그리고 사람들의 뒤엉킴으로 아비규환이다. 이직 우리 가게로는 불길이 번지지 않았다. 그 가게 속, 나무 평상 위에 아버지는 멍하니 앉아계셨다. 웃고 계신 것 같았다. 잘 기억은 못하지만 아버지는 “그래 가자, 빨리 가자” 그러셨다. 우리는 불길을 피하지는 줄 알고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 이후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제 정신으로 계신 것을 본 일이 없다.
군대엘 가려고 호적등본을 떼어 보니 내 이름은 철지徵之이고 생년월일도 일년 앞당겨져 있어 다시 뒤죽박죽이 되었다.
빛 바래고 찢어지고 귀퉁이가 없어진 사진첩을 보면 머리를 빡빡 각은 아버지와 앳되어 보이는 어머니의 결혼 사진이 있다.
자세히 보면 아버지의 얼굴에 짧은 미소 같은 것이 보인다. 그 미소 후에 치룬 아버지의 일생은 너무나 큰 질고였다. 스스로 택하셨던, 또는 그만이 필연적으로 치루어야 했는지는 모르지만, 철저하게 방관자적인 이 자식의 모습을 볼 때 그것이 내 성격 형성에 꽤 영향을 끼쳤다.
때론 냉소적이고 냉정한 내 자신을 돌아볼 때가 많고 스스로 보상하려고 노력도 한다. 내가 잘 무너지는 것은 나에 대한 관심을 보일 때다.
내가 부모 밑에서 삼십여 년 지내는 동안 실제로 그 슬하에 있던 날은 칠팔년도 채 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고아 아닌 고아처럼 이리저리 내동댕이 처진 삶이지만 지금껏 지킴받은 것은 내 안에 아버님의 참 마음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해 나는 한참 한 여인과 열애중이었다.
우리는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며 걷고 있었다. 저만치 한 사나이가 어느 집 돌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해있었다. 나는 애써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 해 겨울, 내가 입원비를 빌리러 잠깐 밖엘 나온 사이에 아버지는 응급실 대기실에서 눈을 감으셨다.
그를 기독교 공원 묘지에 모셨다. 나는 지금 그를 처음으로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