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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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김남희
1993년 02월 132호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준비되어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여행 가방은 학기말에 쫓기는 나에게 큰 위안이 있다. 멋진 달마를 만날 것 같은 기대에 반도半島 횡단을 결심하고는 소를 찾는(尋牛)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동쪽을 거쳐 제주도로, 다시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오며 열 닷새 동안 이른 아첨, 늦은 저녁으로 짐을 싸고 풀면서 그때 마다 느낀 것은, 서울이 우리나라 전체인 양 착각하며 사는 나 같은 서울 사람에게는 반쪽뿐인 나라지만 갈 곳도 볼 곳도 많다는 것이었다.
달마스님은 갈대를 타고 양자강을 건넜다는데, 달마를 찾아나선 나는 육해공陸海空의 온갖 교통 수단을 이용해서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넜다. 기차 안에서 반나절 동안 만난 도반, 암자를 찾으러 나선 산행중에 동행하다가 어느덧 친해져서 줄곧 나를 웃게 한 학생들과 내가 힘에 부쳐 하는 짐을 기꺼이 나누어 들어 준 아저씨들, 모두가 고마운 인연들이었다. 몇 해 전부터는 핸지 나이 한 살 먹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이번 여행 중에는 해가 바뀌어 한 살 더 먹어도 즐겁기 만한 까닭은 무엇일까.
선화禪畵를 그리는 스님들이 계신 곳에는 으레 달마 스님도 함께 계시니, 스님도 만나고 그림도 볼 수 있어서 기쁨이 겹치기 마련이었다. 우연히 좋은 달마도를 보면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되어 생각지도 못한 곳을 가곤 했으니, 그렇게 해서 이번 여행중에 보게된 백학명白鶴鳴스님과 운여雲如 김광업金廣業 선생의 달마도는 조금씩 쌓여 가던 여독을 말끔히 풀어 주었을 뿐더러 월척을 낚은 낚시꾼에 견줄 만한 기쁨을 안겨 주어서 다음 목적지로의 발길을 한결 가볍게 하였다.
선의 세계는 수선이 전부라고만 일던 나에게 선에도 그림이 있다는 것을 처음 가르쳐 준 것이 바로 한 장의 달마도였다. 이렇게 달마스님과의 인연으로 시작한 선화공부가 이젠 어느새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평상 생활平常生活 되어 버렸다. 그래서 선미禪味가 뚜렷한 좋은 달마도를 보면 그의 구년면벽九年面壁 떠올라 참선하는 자세가 되고, 진짜 달마스님을 닮았음직한 달마도 앞에서는 저절로 엄숙해진다. 부처님 모습처럼 자애롭지도 정답지도 않은 달마스님이 내게는 그렇게도 매력있게 보이는 것은 그 험상궂은 얼굴 뒤에 숨어 있는 그의 정신 때문일까. 선화를 많이 접할수록 달마도가 선화 중의 선화라고 느끼게 되는 것은, 붓질이 힘차고 맑으며 먹의 농도가 선명한 달마도를 보면, 보는 사립이 탈속감脫俗感 짖고, 또 그의 정신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갖가지 모습을 한 달마도를 대하면, 저마다 그 그림을 그린 이의 모습과 조금 닮아 있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그래서 달마를 보면 자연히 붓을 잡았던 이의 얼굴도 보게 되고, 달마를 그린 스님을 만나면 그에게서 달마스님의 모습을 봐야 된다. 이미 입적한 스님의 제자들을 보면 으레 그 스님을 뵙는 듯한 것처럼 말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달마도 하면 역시 김명국의 달마도를 빼놓을 수 없다. 선화의 불모지대인 우리나라에 이 걸작의 달마도가 남아 있어서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붓질이 대담하고도 활기차서 단숨에 그려 낸 듯한 이 달마도는 그림이 움직이듯 살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느낌을 준다. 기록에 보면 그는 성품이 호협하고 술을 즐겼는데, 술에 취하면 으레 화흥畵興이 일어 붓을 잡고 거리낌 없는 명쾌한 붓질로 많은 걸작을 그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그의 성품이 이 달마도에 낱낱이 옮겨진 듯하다.
근세에 들어서는 백학명 선사가 달마도를 많이 그렸다고 하는데, 몇 점 남아 있는 학병스님의 달마도는 김명국의 달마도 못지 않게 달마스님의 기개가 살아 있는 듯 하다. 학명스님의 상좌 가운데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야운스님을 전북 부안의 내소사로 찾아 가서 만난 날은 눈이 몹시 내려 무릎까지 쌓였다. 눈을 털어 주시며 “내가 못난 막둥이 상좌입니다”하고 입을 여는 스님의 잔잔한 목소리는 이내 스승에 대한 향수가 깊게 배어 나오는 듯 가볍게 떨렸다. 올해 여든네 살인 상좌스님을 뵈니, 스승과 제자와의 인연이 속세 부모와의 인연보다 이렇듯 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학명스님은 1886년. 스무살 되던 해 우연히 구암사에 붓을 팔러 갔는데 거기서 승복을 입고 공부하는 학인들을 보고 그 길로 고향으로 달려와 영광靈光 불갑사佛甲寺에서 금화錦華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스님은 스승의 뒤를 이어 강사講師를 지내다가 선방을 두루 다니며 오도悟道한 뒤에 바로 중국과 일본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내소사 월명암月明魔에 상주하며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 도인이 없지” 하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상좌권속들이 못나서 빛을 못 보는 게 부끄럽다고 하였다. 스님은 반선반농半禪半農으로 시은施恩를 적게 입고 공부해야 한다며, 직접 대중을 이끌고 여든 두락斗落(1600여 평)의 산내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급 자족해서 일했는데, 그때 스님은 자신이 지은 농부가를 대중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야운스님은 그때의 농부가를 멋지게 불러 주고 나서 “그때가 좋았지?” “그때 오이만한 고추도 나왔어” 하며 맑게 웃었다. 학명스님은 거의 날마다 글과 노래를 지어서 열반가涅槃歌 망월가望月歌 기원가福園歌 해탈가解規歌 참선가參禮歌를 혼자 부르곤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열반가는 스님이 입적하여 상여를 맬때 모든 대중이 함께 불렀다고 한다. 스님은 따로 필법筆法이나 화법畵法을 배운 일이 없는데도 1929년 입적하기 바로 전부터 달마도를 날마다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을 내장사 밑 동구밖 마을에 한장씩 나누어 주며 그것을 걸어 놓고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독송하고 산에 나무하러 갈 때는 염불하라고 하였단다. 스님께서 달마를 그리면 주변에서 시학명시달마是鶴鳴是達磨, 곧 이 그림이 혁명이냐 달마냐 했는데, 야운스님은 은사 스님이 가신 뒤에 그가 남긴 달마도를 걸어 놓으니 마치 스님을 옆에 모시는 것 같았단다. 그러고 보면 달마도를 보면, 그것을 그린 스님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되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스님이 그린 달마도는 지금도 통도사 박물관과 원광대 박물관, 그리고 몇몇 개인의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산에서 뜻밖에 본 운여 김광업 선생의 달마도는 학명스님의 달마도를 근대식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이만여 과顆나 전각한 바탕에서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수행의 산물인 듯하다. 전각가나 서예가로만 알려진 운여 선생이 몇 점 남긴 그림과 글씨는 과연 선의 경지에 깊이 몰입 되지 않고서는 그려 낼 수 없는 걸작이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스님이 살아 있을 때 그림을 좀더 많이 그렸으면 하는 아쉬움 더욱 크다. 기독교 장로였으면서도 평소 승려들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고 하는데, 특히 석정스님과 교류가 깊었다고 한다. 그의 유일한 전각 제자인 심무용 선생을 해서 듣는 생존시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는 풋풋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평안남도에서 태어나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부산에 안과를 개업하였는데, 그때부터 틈만 나면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두 전각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승려였던 심무용 선생이 문하생이 되어 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 뿌리, 죽근竹根, 딱딱한 버섯, 옛 기와나 박조각. 나무 토막 등을 한아름씩 갖다 드리면 몇 주일 뒤에 그것들이 전부 적당한 크기로 다듬어져서 채 나름대로 전각작품이 되어 묵언으로 뽐내고 있는 듯하였다고 한다. 본디 인품이 온화하고 깊어서 세 속에 살아도 일찍이 탈속한 분 같았고 한다. 선생의 동심童心 같고 호수 같은 성품은 선생의 유품에서도 은은히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달마도는 볼수록 예수와 달마와 지신의 모습이 한 장의 그림에 모두 담겨 있는 듯하다. 달마가 바다에 떠 오는데 길이 헛되이 길구나! 을묘년 여름에 운여가 우연히 석정 그림의 뜻을 만지다는 뜻으로 쓰여 있는 화제畵題는 운여가 지고의 경지에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몇 번의 붓질로 끝난 그림이지만 붓질이 몇 백 번씩 간 그림보다도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종교를 떠나서 삶이라는 한가지 수행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뚜렸이 나타냈기 때문인가 보다. 각고刻苦라는 말이 있듯이 선생은 딱게칼 하나로 자신의 뼈를 깎듯이 전각을 하였던 것이 아닐까.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물건을 파내며 자신의 마음도 파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석정스님의 달마도는 자유자재로운 붓선에 선미가 가득 풍겨 나와 스님의 수행과 인품이 보이는 듯하여 볼 때마다 반갑고 이제는 무척 친근하기도 하다. 선생은 붓으로 중생 제도를 하녀 무언無言으로 만가지 설법을 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집에서는 붓을 잡는 것을 파破 속한다고 했다는데. 이제는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져서 그림 그리는 스님이 많아졌다. 그러나 요즘 보이는 몇몇 달마도는 왠지 살아있지 않은 것 같다. 기교가 보이고 붓질이 경직되고 머뭇거려 시원한 맛도 없다. 그러고 보면, 선수업禪修業이 된 바탕에서 챔의 방편이나 여기餘技로 그리면 좋은 달마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승복을 입은 승려가 그렸다고 해서 모두 선화는 아닐 듯하다. 혹시 그의 정신을 그리지 않고 그의 얼굴만을 그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선화가들이 가장 많이 다루는 화제畵題 달마도인만큼 그의 정신을 이어 받는 뜻에서 이심전심의 활기차고 뚜렷한 필치가 아쉽다.
구관이 꼭 명관일 까닭은 없는데, 왜 옛 달마가 더 좋은 것일까. 달마를 찾아 떠난 이번 여행에서는 학명스님과 운여 선생의 달마를 만나 이런 의문과 아쉬움이 삭여졌다. 그리고 복잡하고 번쇄한 현대 문명에 단순 질박하고 초월적인 선화가 주는 메세지는 무한하다는 기대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