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으로 다가온 영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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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인묵
1993년 02월 132호
꿈이었다. 너른 마당에 만장이 걸리고, 번幡이 내려진 제단 아래 경향 각지의 어산魚山들이 며칠 전에 죽은 용왕의 딸을 천도하기 위해 용궁에 모였다. 크고 작은 어류와 파랗고 빨간 해조류도 공주의 죽음을 슬퍼해서 조용한 몸짓으로 재를 지켜 보고, 육지 사람들도 공주의 마지막 가는 길이 굉장한 구경거리인양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소리를 맡은 어장魚長스님의 제불통청諸佛通請이 시작되고 삼일 삼야의 영산재가 베풀어졌다.
범패를 배우기 시작한지 꼭 일 년쯤 되는 나도 그 가운데 한 작법을 맡았다. 염불을 처음 배울 때의 울렁거리던 마음이 다시 가벼운 흥분으로 바뀌어 단전에 힘을 주게 했다. 그리고, 공주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새로 배운 범패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볼 수 있다는데 신명이 났다. 환청 같기도 하고 천상의 울림 같기도 한 염불이 용궁의 넓은 뜰에 가득차고 재는 점점 더 무르익어 갔다. 일순간 천등이 치고 비가 내리는데, 공주는 용의 등을 타고 구만리 장천을 날아가고 수 많은 사람들은 큰소리로 나무 아미타불을 합창했다. 그런데 나의 염불은 자꾸만 목이 잠기고 기어드는 소리로 변해서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고는 꿈에서 깨어났다.
나른한 오수에서 깨어난 인왕산 송림사의 오후는 따가운 햇살이 마루 가득 퍼지고, 미류나무 가지의 매미들은 목청껏 왕왕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매미들 소리보다 더 크게 새벽에 배운 범패 염불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 시절처럼 범패에 미쳐 살아 본적이 없지 싶다. 선문에서도 화두를 챙길 때 가장 중요한 요석으로 몽중일여夢中一如 상태가 되느냐를 따지는데, 당시 나도 밤낮으로 사무쳐 염불을 하다 보니 꿈속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지 싶다. 유행가 가사처럼 소리에 살고 소리에 죽는 그러한 마음으로 범패의 세계에 푹 젖어 있었던 셈이다.
산사의 고요를 깨뜨리고 들려오는 그윽한 염불 소리가 좋아서 출가했고, 절집에 들어와서도 하고 많은 공부 가운데 범패 공부를 선택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누생의 업연의 소치이리라. 맑고 청아한 염불 소리가 생득적으로 남의 소리가 아닌 바로 내 자신의 내면의 소리로 들려 오기 시작할 무렵 주저 없이 이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처음 범패를 본격적으로 수업하게 된 곳은 인왕산 송림사라는 절이다. 지금부터 십팔 년 전 1975년 여름이었다.
일응一鷹스님을 교수로 모시고 지금의 정부의 봉화정사에 사는 정수스님과 유명을 달리한 동파스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길고도 험한 어산에의 길에 처음 들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교수 한 분에 학생 세 명이니 굉장히 이상적인 교육이겠다 싶지만 사자전승의 승가가풍을 중요시하는 일웅스님의 가르침은 힘들고도 혹독한 것이었다. 범패라고 하는 음악의 수행의 깊은 깨달음에서 나오는 삼매의 소리인 까닭에 그것을 배우는 길은 곧 고행 난행의 수행길일 수밖에 없었다. 소리가 좋아서 덤비는 우리에게 일웅스님은 아침에 한 쪼가리의 염불을 가르쳐 주고는 하루 종일 중노릇하는 법에 시시콜콜 훈계 말씀으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문고리 잡는 법에서부터 걸음걸이까지 하나하나 승가의 법도에 맞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십대 중반의 한참 뛰기 좋아할 때는 나이에 이것 하지 말아라 저것은 안 된다 해서 정작 배우고자 하는 범패는 저리 가 버리고 중노릇하는 법에 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스님은 중이 수행의 완성으로 하는 노래가 기능적으로 탁월하다고 일을 다 마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강조하며, 무엇보다 기본이 적절한 중의 모습을 갖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이렇게 스승과 상좌가 승가의 법도에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범패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범패라는 음악이 현대적인 악보가 있어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 사람이 한음 한음 소리를 내고 배우는 사람은 허공에 뜬 소리를 잡아 자신의 소리로 재현해 내는 일을 수업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법이기에 가르치는 사람의 얼굴 표정 하나에서 감정 상태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노래의 진수를 잡아 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일웅스님은 범패를 배우는 처음 길은 중노릇 잘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스승과 상좌가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기본이 된 뒤에야 범패를 배울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범패의 일악장에 해당되는 상주권공을 일 년 동안 배우고 나니 슬그머니 해태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또 얼마 동안의 긴 시간에 나머지 범패를 배운단 말인가 앞으로도 각배다 영산재다 해서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도저히 이러한 상태로는 더 공부를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중이 참선해서 정각을 이루면 다 되는 것이지 달리 무엇을 구한다는 말인가 선방에 가서 참선을 해야 한다. 그러면 달리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수행의 절창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런 유혹이 끊임없이 목덜미를 잡아 당겨 댔다. 이러 저러한 유혹과 해태심으로 정진을 게을리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동안이나 다른 길에서 서성이며 방황하다가 어쩔 수 없는 숙업의 끌림으로 다시 범패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상주권공 다음의 각배를 배울 무렵부터는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중노릇의 의미를 체득해 가서 범패의 맛에 깊이 심취할 수 있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한 시간의 강습이 끝나면 하루 종일 그것을 복습해서 지신의 소리로 완전히 한 다음에 다음 차례로 넘어가는 일정이 계속됐다. 이 무렵부터 한낮의 솔밭 길을 걸으면서 염불을 몇 마디 불러대면 그렇게 마음이 황홀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 솔 향기 싸름하게 감겨오는 산길을 가다가 소나무 등걸에 걸터 앚아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 나와 소리와 숲이 온통 하나가 되는 삼매의 그윽함에 빠지곤 했다. 이 시절은 일웅스님이 그렇게 강조하신 중노릇 잘하는 사람이 범패도 잘한다는 말씀을 이해해 가는 때이기도 했다. 좌절과 방황은 누구에게나 숙명처럼 찾아오는 것이지만, 범패를 업처럼 여기려는 나에게도 공부의 장애는 끝 모를 방황의 마장이 아닌가 싶다. 각배를 마치고 또 한번의 좌절을 겪은 끝에 영산재까지 모두 마쳤다.
수행의 절정에서 내는 범패소리는 그만큼 수행의 깊이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범패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누구나 산란한 마음을 거두고 고요하고 청정한 세계의 울림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절규와 욕정과 슬픔의 누선을 자극하는 오늘날의 음악에 견주어 범패가 주는 의미는 얼마나 크단 말인가. 우리 주변에는 잊혀져 가는 것도 많지만, 사람의 본성을 찾고자 하는 범패음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불행이기도 하다. 마음의 흐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면밀한 소리로 재현하는 범패음은 우리가 상정하는 생사고해의 고통이 항상하는 이상 늘 우리 곁에서 구원의 소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가는 불교의 길 또한 나의 수행이 범패를 통해서 완성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나의 방황과 좌절도 이것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