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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학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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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진열 1993년 02월 132호
세계는 점점 좁아져서 이른바 지구촌이라는 공동체 영역을 연출하고 있다. 지구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 하루 사이에 곧바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제 세계는 분명히 과거와는 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과거와 시간적으로 격차가 클수록 그 문화의 속성이나 질은 이질적일 수 밖에 없다.
불교는 2,500년 전쯤에 인도에서 일어나 세계에 전파되었다. 불교가 처음엔 인도라는 곳의 시공적 영향, 곧 인도 옷을 입고 나타났고 그것이 다른 나라에 전파되어 중국에 들어와서는 중국적인 옷을, 또 한국에 와서는 한국의 옷을 겹쳐 입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라는 가르침은 인도 옷을 내의로 하고 중국 옷을 중의로 하며 한국 옷을 외의로 하여 나타난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불교가 거듭해서 문화적으로 변용하는 곧 옷을 입는 과정에서 불교는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세월이 지금껏 2500년이요, 우리나라에서는 1,700년이라는 말이 되는데, 생각해 보면 지금 시점에서 여러 가지 착착함이 엇갈려 떠오름은 무슨 까닭일까.
그토록 오핸 세월을 거쳐온 불교가 지금은 인류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불교학은 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 하는 반성이 앞선다. 과연 이백 년 남짓 되는 예수교 역사에 비추어 불교는 여덟 배나 되는 역사적 축적을 지니고 있는 데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기여 하고 있는가?
나는 불교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고 솔직하게 단정하고 싶다. 무엇인가 시들어 가는 고목처럼 불교는 뒷전으로 말려나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행사는 거대하게 치르지만 내용은 부실하기 쉽고, 구호는 거창해도 이제 뒤따르지 못하는 외화내허外華內虛나 용두사미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불교는 사회적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반성해야 나는 그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솔직한 원인 규명과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무척 아쉬운 시점에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 불교와 한국 불교학이 미미한 이유는 변천하는 시대와 조직에 부응하는 교리의 재해석이나 응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다. 불교는 어차피 과거에 인도 옷, 중국 옷, 한국 옷을 입었고 또한 그렇게 입어야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거와 엄청나게 변천한 지금에 와서는 옷을 입지 않고 그냥 옛 것만을 되씹고 있다면, 불교는 이미 죽어가는 고목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국 불교 통사를 보더라도 우리는 불교의 흉융이기에 분명히 시대에 부응한 교리적 재해석이 나왔고 또 실천이 뒤따랐으며, 쇠퇴기엔 아무런 창조적인 작업이 없었다. 양적으로 남의 것을 베끼거나 앵무새처럼 뇌까리는 것은 재해석도 아니요 진보적인 실천도 아니다. 그것은 녹이나 좀먹는 밥벌레요 죽은 불교를 하는 사이비 불자들이다.
그러면 살아 있는 불교를 실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과거에 선구자적인 불자들이 그랬듯이 시대적인 상황과 요구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지금 논문 쓰는 내용을 보면 현대 지향적이거나 미래 지향적인 해석은 전무하고 문자 해석 다시 말하면 과거 지향적인 훈고 해석 지나치게 많다. 신라 원효의 사상은 어떻고, 그의 오도悟道과정에 관한 설화는 진짜고, 후대에 지어 낸 조작이고 하며 아까운 지면만을 낭비하며 설왕설래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선종의 초조달마가 이랬으니 그 전통은 이러한 것이요, 오늘날의 선종도 무엇이다는 등 모두 과거 일을 놓고 시간을 소모하는 과거 지향적인 불교상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죽어가는 불교에서 하는 찬란한 과거 회상집착성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순수한 불교 연구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일단 거쳐야 하는 관문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해 놓은 불교 연구 결과만으로도 이젠 충분하다. 곧 이젠 순수 불교학은 다 이루어진 셈이요, 이를 사회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응용하는 응용 불교학이 시작될 차례이다
순수 불교학은 과거의 이야기 거리를 되씹는 복사판에 불과하지만 응용불교학은 역동하는 현대적 상황과 대중의 요구 조건에 따라 제시된 새 불교의 지평이다. 어떤 종교에서나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서 교리적 해석이 나왔고 또한 나오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종교의 생명체가 유지되고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융성기에 발달한 교리 해석이 나왔던 전통을 이어서 오늘날 우리도 그런 해석이 이루어지도록 경주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항간에 관심을 갖는 민중불교라는 것은 일종의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리서 탄생된 산물이다. 곧 민중 불교는 새로운 시대의 불교성을 주도하려는 절실한 몸부림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온 불교의 지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하다. 민중불교는 교리적인 체계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겉 모양새만 불교이지 내용은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어서, 민중불교의 토착화는 실패로 끝나기 쉽상이다. 교리나 교리 체계가 재해석되어서, 그 타당함이 승인되고 공감되어야 한다. 이질적인 내용이나 전통과 차단된 체계가 있어선 안 된다. 그것은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형식과 내용이 새 불교상일까. 먼저 불교의 교리를 해석하되 그 기준을 경전구(40퍼센트), 현 사태(60퍼센트)로 놓고 현 사태의 건전한 방향 제시를 위해 미래 지향적으로 경전구를 해석하는 것이다. 부처님, 보살, 깨달음, 성불, 정토 등 그 개념을 현대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솔직히 이런 개념들은 우리 머리 속에 지나치게 추상회 된 관념으로 새겨 있을 뿐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개념으로는 번역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수교처럼 ‘~ 믿으면 구원 받는다’ 고 할 때 누구나 ‘~’ 는 예수 라고 대답이 나오지만 불교의 경우 ‘~를 깨달으면 부처된다고’ 할 때 ‘~’ 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그처럼 애매하고 모호한 개념 검증이 불교에서는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더욱 헷갈리기 쉽상이고 어렵다고들 한다. 보살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이라는 개념은 더욱 그렇다. 이젠 더 이상 과거에 이룬 것만을 되씹지 말자. 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려면, 되도록 응용 불교학을 하는 불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불교의 현대화는 불교가 시대를 어떻게 재해석하는지에 따라서 그 길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