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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는 자세로 한걸음 한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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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영담 1993년 02월 132호
“당신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디서 왔어? 길에서 이런 것 나누어 주면 경범죄야 알어?”
이 말에 질세라, “야. 임마 넌 누군데 말이 그 모양이냐? 시퍼런 새마을 모자 쓰고 다니면서 하는 짓거리 하구는 꼭 깡패 같잖아? 나이도 몇 살 먹지 않은 녀석이 건방지게, 말조심해!”
내가 처음 부천에서 석왕사라는 존재를 시민들에게 알려 주려고 안내 전단을 나누어 줄 때 동 직원과 다툰 말이다.
새해를 맞이해서 지나온 일들을 되돌아 보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면서 떠오른 말들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더 험한 말들도 오고 갔지만, 지면도 그렇고 점잖은 체면에 이쯤으로 줄여 보았다.
당시 부천시 인구는 십오만 명쯤. 시로 승격하고 일 년이 지난때이다. 십오만명 인구에 불교를 아는 사람은 가뭄에 콩나듯 했고, 있다고 하더라도 교인들 틈에서 고개 한 번 내밀지 못하고 움쿠리고 있을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은 역전 뒤에서 약이나 팔든지 아니면 불자가 써 있는 불전함을 놓고 쉴새 없이 절이나 하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누어 주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인 것도 당연하다. 어쨋거나 포교를 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굳세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번쩍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그거다!”
교인들이 많은 이 지역에서 아아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또 방학도 되었으니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절로 자연스럽게 끌어 들어 유익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혹시 잘못하면 과외를 한다 하여 감옥에 집어 넣을지도 모르니 머리를 쓰고 또 쓰며 생각해 낸 것이 한문 경전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절집에 와서 장판때도 묻었고 눈치밥도 먹어서 척하면 삼척이요, 툭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요, 척하면 귀싸대기 올려 부치는 소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으니, 국민학생들에게 한문 경전을 가르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홍보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백오십 명쯤 모였다. 절 부근에서는 그리 쉽게 모일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인 셈이다. 무료로 가르친다는 나의 작전이 적중한 것이다.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백오십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한 법당에 모아 놓고 목청 돋구며 가르쳤다. 뒷날 아이들이 학교에서 한자를 일아 맞히면 선생님이 어디서 배웠냐고 놀라서 묻는단다. 그러면 아이는 절에서 스님한테 배웠다고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가르친 보람이 있을 만큼 가슴 뿌듯한 일이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포교라면 꽤 자신이 생겨셔, 그것을 바탕으로 유치원 불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유치원은 아직 이르고 또 유치원을 열면 절이 시끄러워져서 절로서의 위엄을 잃게 된다는 노보살들의 근심과 우려가 있었다. 심지어는 유치원을 열면 석왕사에 나오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는 신도들도 있었지만 내 특유의 추진력으로 밀어 부쳤다. 그래서 이제는 얼마쯤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 또 부천이 공단 밀집 지역이라는 특수성을 살려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하려고 홍보를 시작했다. 절에서도 야학을 하냐며 냉소적인 반응과 시각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어렵사리 열아홉 명이 모여 문을 열었다. 야학을 하고 또 거기에 노동자가 모인다면 관에서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기 때문에 관과의 마찰이 불가피했다.
게다가 다음 단계로 시작한 것이 백중절을 기해서 노동자 잔치를 하는 것이었다. 오공 말기 서슬 퍼럴 때 백중 맞이 노동자 대잔치를 시작했다. ‘X머리 XX까부수자!” 하는 구호에 조금은 당황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리를 높여 낼 줄은 몰랐다. 노동자들이 모인다는 소문에 관계 기관에서 알게 모르게 압력이 들어왔다. 노동자들과 함께 함으로써 신 불교 운동을 전개하려는 나의 의지를 시험해 보려고 했던 일이었기에, 어쩌면 관과의 마찰은 당연히 겪어야만 할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문턱이 높았던 사찰 문을 어린이와 노동자, 노인 등 모든 시민에게 개방하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이런 결단을 내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은사스님께 종아리를 맞으며 배웠던 그 꾸중과 가르침이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지난 일을 되돌아보다 보니 문득 출가할 때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사실 내가 출가한 것은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형님의 뜻에 따라서였다. 당시 군인이었던 형님을 면회 갔다가 절에 가면 공부할 수 있다는 형님의 말에 따라 편지 한 장 달랑 들고 출가하였던 것이다. 아버지 같은 은사 스님의 자상함 덕분에 어려운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어린애처럼 어떤 목표나 기준도 없이, 그저 마냥 헐렁이처럼 살아왔던 나에게는 지금 주어진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언제나 은사님께서는 “물위걸용지인勿爲乞容之人하고 능위서타지인能爲恕他之人 하라”
“남에게 용서를 구걸하지 말고 남을 용서할 줄 이는 사람이 되라” 고 가르치셨다. 은사 스님의 경책을 바탕으로 오늘도 또 내일도 자신을 되돌아보고, 포교는 나에게 주어진 소중하고 무거운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살고자 한다. 결코 시주밥이나 축내는 비구는 되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비구의 몸으로 태어나겠다는 서원을 해 본다.

「잡아합경」에서 대장장이 춘다는 이런 질문을 부처님께 올렸다.
“세상에는 어떤 종류의 사문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게송으로 답하셨다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문이 있나니 ,
첫째는 도를 실천함이 뛰어난 사문이요, 둘째는 도를 설하는 것이 뛰어난 사문이며, 셋째는 도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문이고, 넷째는 도를 핑계 삼아 악을 짓는 사문이다. 속으로 삿된 뜻을 품으나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꾸며 거짓을 일삼고 성실하지 못하니, 이를, 도를 핑계 삼아 악을 짓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구리에다 금을 입힌 것과 같은데도 속인들은 그를 보고 훌륭한 사문이라 말하게 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니 맑고 깨끗한 믿음을 버리지 말아라. 다만 얼핏 겉모양만 보고 한눈에 존경하고 가까이 하지 말라. 간사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도 사실은 나쁜 뜻을 품을 수 있느니라.”
「부처님 말씀 92쪽」

나는 과연 이 네 종류의 사문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를 되돌아보며 오늘도 또 내일도 포교의 길을 찾아서 열심히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