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개혁 논의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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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도각
1993년 02월 132호
바람 잘 날 없는 종단이 요즈음엔 꽤 조용하다. 듣기에도 낯간지러운 강북이니 강남이니 하는 편가르기도 겉으로는 사라진 듯하다. 이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수행자 본연의 자리에 돌아가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인의 조소와 비난을 피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 싶다.
종단 분규가 지금까지 일으킨 문제는 허다하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분규를 통해서 종단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가 모두 드러나서 이를 바탕으로 제도 개혁을 위한 종단의 여러 부문에서 분분하게 논의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중앙 권력을 좀더 강화하여 통제에 효율을 기하지는 의견과 대중적인 기반이 있는 교구본사제에 역점을 두자는 의견이 대립하고, 봉건적인 요소가 많은 현행제도를 현대적 의미의 민주제로 고치자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제도적인 측면 말고 문란해진 위계 질서와 승풍을 바로 세우지는 의견 등 많은 대안이 쏟아지고 있다.
필자는 며칠 전 우연한 기회에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종단의 내일을 걱정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모임에서 구체적인 결론은 없었지만, 종단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쓰러져 가는 집에 서까래 몇 개, 기둥 하나 둘을 고쳐 넣는다고 집이 붕괴되는 것을 막지 못하므로 차라리 쓰러질 때까지 그냥 두자는 의견이고, 다른 동배는 그래도 도려 낼 부분은 도려 내고 살릴 부분은 살리자는 의견이었다.
이러한 백가쟁명식의 논의들은 현재의 한국불교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안을 마련하자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병을 근원에서부터 보려는 태도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증상에 따라서 처방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원인을 철저하게 분석하지 못한 채 대안을 논의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반드시 한계를 드러낼 것이고, 병폐를 척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것을 빌미로 종권을 장악하려는 새로운 음모가 나타날 소지도 배제하기 어렵다.
불교 문제를 근원적으로 파악하는 시각 가운데 하나는 한국불교의 중요한 특정인 통불교의 전통에 주목하는 것이다. 통불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바로 드러냈을때 한국불교의 운명을 새로이 개척할 방안이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통불교는 수직적 행정의 능률을 극대화하는 데는 일면 효과적이다. 그러나 다양한 성향의 사람이나 집단에 맞게 설해진 불교를 통불교처럼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하면 그만큼 문제점도 많을 수밖에 없다. 불교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수 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역사적 상황이나 근기의 변화, 언어 풍습 등의 차이에 따라서 크게 달라졌다. 하나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는 특정 집단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 전 인류적 보편성을 견지 할 수는 없다.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한 배경은 방대한 교설을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개인이나 집단의 고통이나 불행들에 맞게 조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시대에서 사람들의 처지와 요구에 따라서 발전한 부파나 종파불교는 불교의 폭을 더욱 넓혔다.
통불교든 종파 불교든 그것은 각 나라와 민족의 특수성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통불교적인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은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특수한 통합력이나 기질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통불교가 정착하기까지의 역사적인 과정이다.
오늘날 풍미하는 통불교의 전통은 불교 내적인 요구와 외적 상황의 산물이기도 하다. 내적인 전통은 수많은 지역과
오랜 역사를 거쳐오며 실로 방대하고도 다양해진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여러가지 모습을 일미一味 일법一法의 종취로 회통한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에서 시작하였다. 그 뒤 구산선문이니 오교양종이니 하는 분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조의 선교양종 시대를 거쳐서 오늘날 통불교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외적인 상황은 이조와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요구된 전제왕권의 간접에 의한 각 종파의 통폐합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 간접은 불교 집단을 효율적이고도 용이하게 지배하려는 것이었고, 불교는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끌려오기만 했다.
이로써 한국 불교는 종파적인 특수성은 궤멸된 채 통불교라는 이름으로 뭉뚱거려져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가 충돌하면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나무에 여러 기지 꽃이 피지 못하듯이 수행의 관점이나 종지가 다른 불교적 입장을 한 테두리에 모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는 불교가 정상적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문제를 푸는 일도 무미 무취하고 혼란스러운 통불교적 전통을 해체하고 종파적 특수성을 살려 내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역사로부터 부정당해 온 불교의 자리를 제대로 세우고, 갈피 잡기 어려운 불교를 제대로 이해 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