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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대각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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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한보광 1990년 10월 104호
6. 포교의 현대화
우리나라에 있어서 포교의 현대화는 조선말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특히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탄압과 배척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산중에서 한발치도 내려오지 못하였으며, 도성의 출입마저도 금지되어 일반 민중들과 접촉할 기회는 거의 없었으므로 서민에 대한 포교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실패와 함께 서구종교의 범람은 우리 종교계에 일대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서구 열강의 세력을 등에 업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포교활동은 나라야 흉하든 망하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교세의 확장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용성선사는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대각인(大覺人)로서 어떻게 이 민족에서 불법(佛法)을 전해야 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선사(禪師)의 입장에서 모든 민중의 바른 길을 열어주고 어렵고 난해한 불법을 쉽고 편리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의 연구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모든 교화의 구심점을 다수의 민중, 그것도 하위층에 속하는 서민에 두었다는 점이다. 이 민중이야말로 대각운동의 모체요, 교화의 대상이며, 불교중흥의 초석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는 ‘중앙행정(中央行政)에 대한 희망’이라는 글에서
“현금(現今)은 대중적이요, 영웅적이 아니다. 영웅이 많을수록 야심(野心)이 많고 야심이 많을 수록 멸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웅대표적인 인물이 많은 것보다 수평적(水平的) 기관이 완전한 것이 좋다.”
라고 하여, 불교 포교운동을 철저하게 민중위주로 뿌리내리고 조직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선사의 첫번째 사업은 역경이었다. 선사는 한문으로 된 경전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읽지 않고 방치해 둔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며, 부처님의 바른 뜻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선사는 스스로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난해한 한문경전을 알기쉬운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많은 저술도 남겼다.
두번째는 대중을 직접 찾아나선 점이다. 즉 서울에 상경한 선사는 신도집에서 선회(禪會)를 열고 포교에 전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못이겨 먼 타국으로 떠난 민중을 찾아 만주에 대각교당을 건립하여 그들에게 정신적인 안정과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만주에 세운 대각교당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국제포교의 효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선사의 포교방법은 사원에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만을 상대로 하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포교의 대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교화하고 깨우치게 하였다. 그러한 방법으로 직장 속에서 포교하는 산업포교(産業布敎)와 각 지방을 다니면서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순회포교(巡回布敎)도 강조하고 있으며, 스스로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셋째는 시내 각 곳에 포교당의 건립이다. 선사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선사의 평소 주장은 청정한 수도장은 산중에 두고 포교당은 각 도회지에 두어 대중 속에서 포교에 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실현을 위하여 선학원(禪學院)과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선학원은 여러 선사들과 같이 하였으며, 대각사는 단독으로 건립하였다. 이때만 해도 우리 불교에서는 서울시내에는 각황사(覺皇寺;지금의 조계사) 하나 뿐이었으나, 천주교·개신교에서는 수많은 교회들이 건립되었고, 일본의 각 종파에서도 앞을 다투어 교당을 설립하던 때였다.
넷째는 의식집의 한글화이다. 선사는 3·1독립운동 민족대표의 1인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과 더불어 활발한 교화활동을 펴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역경사업이란 점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선사는 경전의 역경뿐만 아니라 불교의식집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글화된 의식을 집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역경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있어왔으나 의식의 한글화는 용성선사가 최초이다. 이만큼 의식을 우리말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일 뿐만 아니라, 비난의 여지 또한 많은 것이다. 그러나 선사는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의식의 접전은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염불이라 하더라도 제자들이나 불자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그 의식에 참여한 대중들은 지루할 뿐 그 이상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염불소리만 들으면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불공·시식·염불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집행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음률이나 리듬 등에도 대단히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이것을 총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이 「대각교 의식집」이다. 여기에 의하면 천수경부터 시작하여 각종 의식이 완전히 한글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선사의 노력은 1927년 경에 시작되었으나 아직도 널리 실천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다섯째는 현대 불교음악의 보급이다. 선사가 서대문감옥에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가 타종교에서 찬송가 등을 부르면서 노래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사는 1927년, 즉 64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대각사 법당에 오르간을 들여놓고 노승이 스스로 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신도들은 노승에게 망령이 난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사는 이러한 것에 개의하지 않고 노래를 보급하고 손수 작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때만 하여도 우리 불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래를 모아놓은 것이 「대각교가집(大覺敎歌業)」에 실려 있다.
여섯째는 어린이 포교이다. 선사의 관심은 새로운 세대인 어린이 포교에 역점을 두었다. 선사가 본격적으로 어린이 포교활동을 체계화 한 것은 65세 되던 해인 1928년 4월 15일에 대각일요학교를 개설하고, 그해 5월 6일에는 대각사 법당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진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당시로서는 일반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중 하나였다. 신성하고 근엄해야 될 법당에서 어린이들이 노래부르고 춤추고 무용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기성불자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사의 일요학교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였다. 이때 일요학교에 다니면서 선사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았던 어린이들이 뒤에는 출가하여 스님이 된 사람도 현존하고 있으며, 훌륭한 재가불자로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신도들을 지금도 가끔 만나곤 한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용성선사께서는 어린이 포교에 대한 일반신자들의 반대가 완강하였으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어린이들에게 전력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선사의 뜻은 미래불교의 기대를 어린이 포교에 두었던 것 같다.
일곱째는 의식을 통한 교화활동이다. 이 시대에 만해 한용운은 기성의 불교의식을 부정하며, 염불당 같은 것은 없애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용성선사는 기존의 의식, 즉 방생법회나 영가천도의식 등을 부정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러한 의식을 통한 포교를 강조하였다. 「조선글 화엄경」의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라고 하는 글에서
“십년을 예정하고 년년이 법계고혼을 천도하는 천도식과 방생회를 설립하는 일 이 모든 일에 얽매이고 분주하게……”
라고 하고 있다. 즉 10년 동안 영가천도회와 방생법회를 정기적으로 시행했다는 점이다. 또 「佛敎誌」 41호에 의하면, 1926년 8월 23일에서 29일까지 7일간 계속해서 법회를 열고 30일에는 한강변에서 방생 및 영가천도를 하였는데 이 법회에 참여한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선사는 기성의식을 통한 포교도 소홀히 하지 아니했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사의 포교의 현대화 방법은 종횡무진하였으며, 오늘날도 실천되지 않고 있는 방법들을 과감히 시행하였다. 선사는 어디까지나 포교의 대상을 대중에 두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알기 쉽고 신속하게 대각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종래의 구태의연한 포교방법을 과감히 탈피하고 개선하여 현대화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위에서 말한 일곱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선사가 미래의 대각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어린이 포교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의식을 한글화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도 실천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하루 빨리 체계화되고 정리되어 누구나 쉽게 의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