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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경허(鏡虛)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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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0년 10월 104호
경허스님(1849∼1912)께서 살았던 시기는 한국의 반만년 역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암울하고 격랑이 심했던 시기에 해당된다.
조선왕조가 서서히 몰락하던 헌종 15년 기유(己西) 여름, 현종이 승하하자 무식하고 어리석은 강화도령 철종이 어릿광대처럼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고 열강은 벌떼처럼 일어나 조선반도를 심하게 약탈하고 수탈하더니 급기야는 일본에게 합방을 당하고 말았던, 극도로 암울한 시기에 스님은 일생을 살아가셨던 것이다.
조선사회 전체가 도탄에 빠졌으니 불교는 일러 무엇하리. 역사의 진행방향은 이씨 왕조의 패망쪽으로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세계정세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한낱 종이호랑이였으며, 태평천국의 난으로 청나라 자체가 붕괴 직전에 있었다.
왕실은 극도로 의지할 곳 없이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민심 또한 피폐하여 진주 민란과 모반이 각처에서 일어나는 등 말기적인 병리현상이 나타났다.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 등의 열강들이 군함을 몰고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점령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급기야는 18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1910년에는 일본에게 합방당하기까지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 당시 종교적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조를 지배했던 성리학은 이미 그 권위를 상실하고 있었으며, 실학과 서학(천주교, 기독교)이 집요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서양 열강과 함께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미 철종 9년 1858년에는 목판으로 된 천주교 교리서가 이 땅에서 출간되었으며, 1887년에는 아펜첼러에 의해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서울에 세웠던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격랑 속에서 불교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미 경허대사 이후의 법맥도 희미해져 교종도, 선종도 모두 그 특색을 잃고 다만 통불교적인 바탕 아래 겨우 가람이나 수호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며, 백파(白按:1767∼1852)스님이 쓴 선문수경(禪文手鏡)에 대한 초의(草衣:1786∼1866)스님의 사변만어(四辯漫語)로써 선론(禪倫)이 있었을 뿐 뚜렷한 학술적인 성과나 업적은 없었다.
그 후 열강과 함께 일본이 이 땅을 점거하면서 일본 승려들의 출입이 잦아지고 난 이후 고종 34년 1897년에 승려 도성출입이 허용되었을 뿐이었으며, 일본불교가 서서히 그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불교적 상황 아래에서 경허선사는 전주의 작은 마을 자동리(子東里)에서 송두옥(宋斗玉)과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다.
경허선사는 오늘날 한국 선원의 지대방에서 침튀기는 가십거리와 전설과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으레히 있을 법한 용을 보았다느니, 무슨 길조의 정조를 보였던 어떤 탄생설화도 없이 평범하게 이 땅에 태어났다.
어쩌면 시대적 상황이 그런 것을 전해줄 만큼 한가하지도 태평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큰 감동 없이 태어났다. 일세를 풍미하던 풍운아로, 마치 이방인처럼 쓸쓸하게 일생을 마감해야 했던, 약간은 고즈넉한 스님의 생애에 오히려 그런 쓸모없는 허언(虛言)은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밖에는 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늘날도 경허선사의 매력에 다분히 경도되어 있는 많은 납자들의 낭만이 훨씬 살아 있는 경허선사의 풍모일 것이다.
경허선사의 집안은 비록 가세는 빈한했지만 뼈대 있고 좋은 가문에 속했다. 스님의 나이 아홉 살에 불행히도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를 따라 시홍에 있는 청계사의 계허(桂虛)스님에게 맡겨졌다.
어린 행자는 비록 행자생활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굳은 심지와 신심으로 인내할 수 있었다.
스님의 나이 14살 때 비로소 박처사라는 선비에게서 문자를 배웠는데 영특하고 총명할 뿐 아니라 글 배우는 것이 너무나 기뻐 고된 행자생활에도 불구하고 매일 5∼6장의 글을 능히 외웠다. 그로써 그의 천품(天品)이 절 안에 널리 알려져 능히 앞으로 법기(法器)가 될 것을 짐작케 하였다.
무슨 영문에서인가는 모르겠으나 스님의 첫 불가의 인연이었던 계허스님이 퇴속을 하게 됨에 따라 계허스님은 어린 경허를 계룡산 동학사에 계셨던 그 당시 유명한 만화(萬化)강백에게 천거를 했다.
그 이후 스님은 만화스님에게서 일대시교(一大詩敎)와 유서(儒書)를 비롯한 노장(老莊)을 두루 섭렵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되었다.
스님은 학인들의 권유에 따라 02세에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되어 제방학인을 가르치는 명망있는 강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옛 스승 계허가 생각이 나고 그리웠다. 이미 수소문하여 옛 스승이 서울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지라 상경을 결심했다.
마침 때는 여름이라 천안 부근을 지나는데 모진 비를 만나 민가에 머물러 피하려 하였으나 악성 콜해라가 만연되어 온 마을에 시신이 널려 있는 참혹한 죽음의 현장에서 생사의 절박함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그렇게 유창하게 삶과 죽음을 학인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 했었는데 막상 죽음의 현장에 서니 역시 죽음은 절박하고 두려울 뿐이었다. 이미 썩고 있는 시신을 보면서 자신은 이제까지 한낱 앵무새에 불과함을 알았고, 생사를 진정으로 초탈하지 못하고서야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치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총총히 신라 땅으로 돌아왔듯이 경허스님 역시 가던 길을 멈추고 동학사로 발길을 돌렸다.
말과 언설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무상(無常)을 말하고 무아(無我)를 연설하나 그것이 죽음 앞에서 무엇이냐? 지식이 제 아무리 많고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한들 생사 앞에서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당장 학인들을 불러 해산시키고 강원을 철폐하고 문을 안으로 닫아 걸고 대 용맹정진을 결행하였다.
그러던 11월 보름 한 사미승이 지나가면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구나”는 말에 활연대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