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사는 깊은 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산사의 설경은 삭막하고 추울 것만 같은 이 겨울에 자연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줍니다. 어쩌면 이 겨울이 해인사에서 사는 마지막 겨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봄, 여름, 가을도 이제 한 철씩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기록하고자 하는 해인사와 가야산의 사계도 이제는 더 이상의 연습은 허용하지 않는 단 한 번의 기회만이 남아 있습니다.
요즘 일과의 하나는 <다음카페>에 해인사의 산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산새 이야기와 스님, 좀 어색하고 의외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전문가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하고 있는 산새 이야기는 특별히 산새만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계절적인 요인이 큽니다. 산새는 하고 있는 자연 이야기의 일부에 속할 뿐입니다. 야생화와 나비가 없는 지금은 산새가 숲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새 이야기 전에는 야생화와 나비 이야기가 주요 소재가 되었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카메라로는 사실 산새의 모습을 담아 이야기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바로 곁에 있는 자연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식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제암 계곡 물까마귀는 차가운 계곡물에 머뭇거림 없이 과감하게 뛰어듭니다. 우리 곁에 물까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3년 만에 처음으로 알았듯이 이 자연속에 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연은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우리를 품어 줄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땅속, 거기엔 나를 야생화와 자연의 세계로 이끈 숲속의 요정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바로 얼레지입니다. 얼레지씨는 개미의 먹이로 개미굴에 저장되었다가 살아남은 녀석이 발아를 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얼레지는 발아해서 6년이 되면 지상으로 나오고 7년째에 잎이 두 장이 되면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꽃피는 시기는 4월입니다. 따스한 봄 햇살이 내려쬐는 숲 속, 비옥하고 양지바른 곳에 핀 얼레지는 포행길 나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습니다. 해인사에 살면서 얼레지를 처음 보기도 했지만 얼레지의 단아한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얼레지의 모습을 보고 난후 다른 야생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니까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보이지 않았던 야생화의 모습들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보이기 시작한 야생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분위기와 다른 빛깔로 가야산과 해인사를 장엄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신비로운 모습을 지켜보며 보낸 시간은 어느덧 3년이 흘러 사교반이 되었습니다.
올해 초 해인사와 가야산의 사계를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한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로선 하나 둘 필요한 준비를 바로 시작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메라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아직 학인 신분인 나에게는 카메라를 살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야생화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빌리고 포행길에 만난 여러 가지 식물과 나비를 찾아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의 식물도감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동정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각해 낸 것이 인터넷이었습니다. 예상대로 많은 관련 사이트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친절하게 나의 질문에 응해 주고 자료가 많은 사이트 한 곳을 택하여 이용했습니다. 이렇게 야생화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가는 중에 원력이 있으면 이루어진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정말 그런가 봅니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쉽게 인연을 만나서 카메라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6월, 하안거가 시작되어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나의 작업은 점심공양 후 오후 자유시간에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지천인 야생화를 만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야생화를 기록하는 작업은 준비가 거의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이었습니다. 야생화를 주로 기록하다가 만난 도롱뇽, 긴꼬리도마뱀, 아무르산개구리, 버들치, 살모사, 하늘소 등은 나의 작업반경을 자연 전체로 확대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다가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 문제가 발생했고, 저도 그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해인사 강원스님들이 올라간 날 폭력사태가 있었고 막연하게만 생각해온 환경의 문제가 피부에 와 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절과 자연은 보이지 않는 끈을 갖고 있었습니다. 딱히 절이 자연에 해 준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그대로 있게 해준 것이 가장 많이 해 준 것인 것 같습니다. 이 산과 절의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면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환경의 문제를 불교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카페’를 열었습니다.
언제 나의 이야기가 막을 내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스님의 신분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옳은지도 사실 출가한지 얼마 안 되는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자연의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 스님들이 앞장서서 이 자연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겨울 산사에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굶주린 산새들은 용감해집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더 이상 장애가 되지는 못합니다. 오직 먹이에 대한 일념만이 있을 뿐입니다. 눈 내린 산사는 산새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가야산의 산새는 도심의 산새와는 사뭇 비교되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깃털을 갖고 있습니다. 산새의 깃털에서도 가야산의 맑고 순수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살면서도 무심코 지나치던 자연을 새로운 눈을 갖고 기록해 온지 이제 세 번째 계절이 되었습니다.
가야산의 봄은 유난히 늦게 오는 것 같습니다. 봄을 기다림에 목말라 하는 사월 가야산의 잣나무 숲 사이에 얼레지가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얼레지와 더불어 가야산에는 희귀한 식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환경부에서 멸종위기의 식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종種들도 있습니다. 이런 종들은 가야산에서도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어 아마도 우리의 다음세대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등산객의 발길이 그들의 영토를 자꾸 침식하고 멸종의 위기로 몰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조바심이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본 스님들 중에는 이런 야생화를 만나려면 어디에 가야 되는지 묻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작업이 끝나면 CD에 담아 강원을 마치고 제방으로 흩어질 도반들에게도 하나씩 줄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도반 스님들이 이 기록 속에서 아름다운 해인사를 추억하며 그 속에 깃들여 산 시간들을 잊지 않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