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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모든 것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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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3년 01월 251호
얼마 전 12월 중순에 들은 이 말이 마음 언저리에서 맴돈다. 하루 일을 챙겨야 할 곳에 잘 보이도록 묵은 달력을 내리고 새해 달력을 걸면서 문득 하루하루가 지닌 힘을 느낀다. 하루라는 시간의 길이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한평생을 두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무언가 한 가지 성과를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한 생각에서 비롯되고 찰나에 결정되며 하루의 기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하루라는 시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또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시간의 중요성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절실해진다. 원효 스님께서 쓰신 <발심수행장>의 끝 부분에서 찰나찰나 시간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있다. 내가 초심시절에 참 좋아했던 말이다.
“시간시간이 흘러가서 속히 밤낮이 지나고 하루하루가 흘러가서 속히 한 달 그믐이 지나며, 다달이 흘러가서 홀연히 내년이 닥치고 연년이 흘러가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에 이른다. 부서진 수레는 갈 수가 없고 사람이 늙으면 수행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 어찌 게으름만 피우고 수행하지 않고 헛되이 일생을 보내겠는가”
참으로 급하고 급한 일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 정진할 것을 간곡히 밝힌 대목이다. 그렇다. 세월이, 아니 하루하루 찰나찰나가 모든 것을 만든다.
아마 “한 번 더 이런 삶이 주어진다면 정말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라는 바람 안에는 부족함과 후회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후회 없이 삶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고, 어떤 결정 앞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도 후회가 있고 아쉬움이 따르는 법이다. 때론 그래서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버리고 다시 쓰는 편지처럼 그렇게 새롭게 수행자로 거듭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허나 세상이 아무리 최첨단으로 변해가도 지난 세월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는 아직 발명하지 못한 것 같다. 아마 그것을 누군가가 발명한다면 역대 억만장자들 못지 않은 거부가 되지 않을까도 싶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요즘 용기 있는 사람은 이 세 가지를 갖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자동차와 컴퓨터 그리고 휴대전화를 갖지 않는 사람, 그 세 가지에게 시간과 비용을 도둑맞지 않는 사람, 그 세 가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제는 그 세 가지를 벗어나면 불안하고 불편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이 편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들로부터 지배를 받으며 시녀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런 삶의 풍경은 우리 수행자들의 삶에서는 비껴 가도 좋으련만 우리라고 해서 예외가 있겠는가.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자동차가 신족통의 신통력을 대신해 주고, 컴퓨터 마우스 하나로 세계를 넘나드는 인터넷은 천안통도 열어 준다. 화면까지 서비스하는 휴대전화는 바로 천이통이 아니겠는가. 이런 신통을 물건이 대신해 줌에도 불구하고 옛 스님들의 그 수행력과 사자후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에 참 마음이 막막했던 일이 있었다. 아는 불자님이 전화를 걸어 왔다. ‘스님! 제가 누군데 저를 기억하겠냐’고 했다. 물론 ‘기억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불자님은 말을 천천히 하고 더듬기까지 했다. 우선 자기의 그런 현상을 먼저 설명했다. 어떤 충격으로 인해서 기억상실증에 우울증까지 겹쳤다고 했다. 연락이 없었던 일년이 채 못 되는 시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으로 짐작이 갔다. 그런 일이 있기 몇 년 전에 그 불자님의 서너 살배기 아이가 어찌나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인사를 잘 하던지 그 인연으로 만났다. 너무나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고 젊고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마음의 짐이 있었던지 나를 몇 번 찾아와 마음을 터놓았다. 나는 그 불자가 모든 일을 지혜롭게 잘 해결해 가리라고 믿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간간이 알려 오던 소식이 끊긴 지 일년이 다 된 시점에서 그런 소식을 접했다. 자기 수첩에 명함이 얌전하게 꽂혀 있었는데 방송 관계 일하는 사람과 각 나라 대사들의 명함이 많이 있었으니 일과 관계된 사람 중에 성은 진씨고 이름이 명이라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참을 지나다가 이렇게 명함을 간직한 사람이면 자기를 기억하리라 생각하고 ‘누구냐’고 아기 엄마한테 물었다고 했다. 전혀 나를 기억할 수 없는데 아기 엄마가 설명해 줘서 스님을 알게 되었노라고 하면서 찾아온 그 불자님 앞에서 나는 참 막막했다. 어린아이 같은 지능에 참 순진무구하기까지 했지만 그 불자님의 답답함을 생각하니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동안에 많은 일을 했으니 좀 긴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마음 급하게 먹지 말고 건강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라’고 말했지만, 부모님도 몰라보고 아이와 아내도 몰라보는 그 답답함을 눈물로 말하는 불자님의 심정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기 좋은 말로 잘못된 그림을 지워 버리고 하얀 백지에 다시 원하는 그림을 그리듯이, 아니면 무언가 지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잘못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지워 버리고 다시 새롭게 인생을 포맷 시킨다고 생각하자는 말은 차마 못했다. 드라마나 소설의 주인공 같은 가상의 인물이 아닌, 내 눈 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에게 그저 허공에 맴도는 그런 말은 하기 싫었다. 그저 그의 고뇌를 알면서도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과거를 백지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는가 하면서 서로 웃었다. 깨달은 선지식은 마음 뒤집기, 즉 중생에서 부처님의 경지로 드는 것이 손바닥 뒤집기만큼 쉽다고 했지만 즐거우면 웃고 괴로우면 눈물 흘리는 중생의 경지에는 그것이 태산을 옮기는 것보다, 바닷물을 다 퍼내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그 불자는 그 모습 그대로 나에게 선지식이었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 보니 병원이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그런 것, 지워 버리고 다시 쓸 수 없는 것이 삶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한 해를 몽땅 과거로 옮겨 놓는 이 하루하루의 힘이 얼마나 무섭고 소중한 시간인가 하는 것이 가슴을 멍멍하게 한다. 바로 지금 하루가 주는 이 의미를 알지 못하면 한 달이 가도, 아니 십년이 지나도 알지 못하고 평생이 그렇게 흘러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02년이 밝아오는 2003년의 하루에게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자리를 내 주고 있다. 이제 누구나 앞에 새롭게 주어진 2003년, 삼백육십오일은 아쉬움과 후회가 없는 한 해이길 바라고, 게으름과 번뇌에는 많이 인색해도 좋겠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어려운 이웃을 살피는 마음은 너그럽고 오롯한 마음으로 정진하는 열정만은 여여하길 바란다. 새해에는 <해인>가족 모든 분들이 눈 밝은 스승을 만나 지혜가 충만한 삶으로 지속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