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전에 한번은 제주를 여행했다. 그 때 동쪽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지극히 평이한 주변 풍경이 너무나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래서 동행한 친구에게 ‘제주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선한 복을 지어서 여기에 태어나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살아갈까?’ 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 때는 제주에 사는 사람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 후 긴 삶의 여정에서 출가사문이 되고 우연히 맺어진 인연을 좇아 살다보니 이 곳에 와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도 숙세에 큰 악업을 짓고 살지는 않았나 보다. 비록 제주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제 2의 인생이라는 출가사문의 터전을 제주에서 엮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지난해에 우리들은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적인 역사를 분출했다.
그리고 이번 대통령 선거의 진행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성숙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비록 종단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출가사문이 버젓이 승복을 입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온 동네방네 벽보에 나붙고 TV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부끄러움을 감출 길 없다. 이러한 일이 비록 군소 종파의 개인적인 일이라고 애써 치부해 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출가자의 정체성 확립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해마다 송년 때가 되면 새로운 각오로 새해 살림을 구상해 보지만 사실은 새해에 대한 순수한 기대이기보다는 부끄럽게 살아온 지난해에 대한 참회의 마음이 더 큰 게 사실이다.
작년에는 올해의 삶을, 아궁이의 장작을 잘 타오르게 도우다가 나중엔 그 자신도 타버리고 마는 부지깽이 같은 삶을 살고자 다짐하면서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오히려 ‘나 자신의 편안함을 더 추구했구나’하는 부끄러움이 더 크다. 지난해 계획했던 좌표도 완성하지 못했으면서 올해는 또 어떤 계획으로 살아가야 할까?
한 해를 계획하다가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초저녁에 달빛이 하도 밝아 문을 열고 나가서니 열이레 달빛이 너무나 정겹게 비치고 있었다. 보름을 지나 저물어 가면서도 당당히 자신의 역량을 다해 고유한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달빛 아래 서서 문득 새해에는 나도 저 달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강유수 천강월千江有水 千江月이라고 하였던가. 일천 강에 물이 있으니 일천 강에 달이 비친다고 노래한 고인의 크고 평등한 달의 성품도 배울 만할 것이다. 그리고 기울었다 가득 찼다 하면서 그 때마다 고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달의 유연함도 새해에는 함께 배우면서 살아가고 싶다.
때로는 휴식이 더 큰 전진의 탄력성을 갖게 한다는 이야기는 쉽게 하면서 사실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마치 매일 매일 똑같은 크기로 쉼 없이 달려가는 태양과 같이 살아가는 각박함이 당연한 현대 사회이지만 이런 각박함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다. 새해에는 달과 같이 탄력있고, 여유있는 삶을 살고 싶다. 보름달같이 역량이 차오르면 마음껏 분출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믐같이 숨을 죽이고 보름을 꿈꾸며 자신을 가꾸는 달을 닮은 삶을 살고 싶다.
초기 율장에 보면 부처님과 제자들은 보름날 밤에 달빛 아래 모여 자자와 포살을 행했다. 작열하던 인도대륙의 태양이 숨을 죽인 순간, 짙은 노을 빛을 이어받아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면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요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께서 몸소 대중들 앞에 나서서 ‘지난 기간 동안 내게 허물이 있으면 누구나 말하십시오’라고 세 번을 말하시면, 모든 대중은 한결같이 우러르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조금도 허물이 없습니다’라고 응답하면서 포살과 자자를 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시며 시작하는 보름 달밤의 포살과 자자는 모든 대중들이 숨김없이 자신의 죄를 드러냈고, 또 타인의 고백을 귀담아 들은 모든 대중들은 스스로 뉘우치고자 고백하는 수행자의 허물을 잘 들어 주는 것으로써 과오를 저지른 수행자들을 참회시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했다.
부처님께서 자자의식을 보름날에 정한 것도 보름 달빛의 은은한 밝음이 우리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묘한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믐이 되면 어둠 속에서 남모르게 수행하고, 보름에는 함께 모여 탁마하는 아름다운 삶의 탄력성을 올해는 꼭 익히며 살고 싶다. 허물이 많은 삶을 사는 탓일까. 왠지 일년에 보름이 열두 번이나 되풀이된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게 느껴진다.
제주에서의 삶을 부러워했던 작은 발원이 결국에는 나 자신을 제주의 삶을 살게 해 주었듯이 지금의 작은 바램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 다시 해가 저물 때 부끄럼만 더할 수도 있겠지만, 새해에는 달과 같이 여유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작은 서원을 세우고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