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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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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禪話 선화禪畵 - 설곡 2003년 01월 251호
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선의 세계,
그 곳은 부처도 넘볼 수 없는 곳

선수행을 처음 시작한 누군가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스님! 저는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물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닐세.”
그가 다시 물었다.
“대체 어떤 것이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진정한 까닭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그 납자는 확철대오하여 생불이라고 불리는 큰스님께 자신의 의심을 풀 수 있기를 기대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또 다른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질문이다.

“뜰 앞의 잣나무?”

수행자는 그 순간부터 이해할 수 없는 대답, 아니 새로운 질문에 몰입하여 끝없이 의심을 더해 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밥 먹을 때나 잠잘 때나 오로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대답에 대하여 한없이 의심한다. 수행자를 삼매에 몰입하게 하는 것, 이것이 선이다. 선은 의심 덩어리, 그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선을 언어로 설명하려 한다거나 개념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미 선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나 개념 등 그 무엇으로도 표현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선은 오히려 질문자로 하여금 의심을 더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선의 세계를 말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부처님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직 가섭만이 부처님의 심중을 헤아리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어 이심전심을 이루었다.
선은 만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서로 계합契合하는 당사자들만의 것이다. 조주 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다 깨달음을 이루거나 삼매에 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선은 절체절명의 바로 그 자리(當場)에서, 바로 그 순간(當時), 바로 그 사람(當人)만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단 한 번의 바로 그(卽)’ 수단이다.
근래 선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중국의 당송대唐宋代에 설해진 화두는 현대인들에게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서 논란이 인 적이 있다. 화두가 누구에게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관건이 시대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를 수 있고, 지금의 현대인이라도 깊은 의심을 지어 갈 수 있다면 깨달을 수 있다.
선의 세계는 인연과 근기根機가 맞으면 가난한 농부이거나 일자 무식인 사람도 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다. 그 곳은 설사 부처라 하더라도 기연機緣 없이는 넘볼 수 없는 자리다.

선화의 세계,
그것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표현하는 것


이처럼 선은 개념이나 언어 등으로는 도무지 표현 불가능한 세계지만, 그렇다고 침묵에 빠져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깨달음을 체험한 선사들은 도리어 자신이 도달한 경지를 표현함에 있어서나 포착한 깨달음을 전달하는 수단과 방법에 있어서 자유롭다.
그 가운데 선기禪機나 선정신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선화禪畵는 매우 독특한 방법 중의 하나다. 선사이면서 동시에 화가인 이들에 의해 창조된 선화는 일반적인 화가들이 구사하는 번잡한 속기俗氣를 초월하여 단순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창조적인 선기禪氣에 의해 이루어진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송명宋明의 중국선화와 조선과 근대 한국의 선화들의 의미를 규명해보려 한다. 이들 작품과 작가의 삶을 통하여 선화의 특징은 무엇이며, 선화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분석적으로 탐색하게 될 것이다.
선화의 성격과 특징은 여럿이지만 가장 핵심적 특징 하나만을 들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파격적破格的 조화’를 말해야 한다.
회화의 일반적 요소는 선線과 면面과 색色이다. 이 셋 중의 어느 하나를 상정하지 않는 회화는 생각하기 어렵다. 더욱이 붓을 사용한 채색을 위주로 하는 중국 회화에 있어서 선과 색채를 제외하고는 회화를 논할 수 없다. 그러나 선화가들은 한결같이 색을 버리고 수묵만을 사용했다. 물론 수묵화라고 해서 모든 수묵화가 선화일 수는 없다. 다만 이전의 화가들이 빛을 이용한 찬란한 색채로써 사물을 묘사했던 데 비해, 선화가들이 색을 버리고 선만을 구사하거나 색과 선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면만을 채용한 것은 참으로 중대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송대 리양카이(梁楷:1140?~1210?)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발묵선인도潑墨仙人圖’를 그리면서 화면 전체에 선線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종이 위에 먹을 퍼뜨림으로써 사물의 윤곽을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붓을 사용한 선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통속적인 중국화의 개념을 무너뜨림으로써 파격적인 화법을 창조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는 기성의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飄逸) 자유로운 필법과 모든 것을 극도로 단순화시키면서도 표현에 자유자재한 선화를 창조했다.
리양카이의 발묵선인도가 중국회화사에서 격조있는 선화로 인정받는 것은 발묵법潑墨法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선禪의 파격적 성격과 선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