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왕조에 걸쳐 역대 왕조의 역사인 실록實錄을 보관하는 장소를 ‘사고史庫’ 또는 ‘사각史閣’이라고 하는데, 가야산 해인사는 고려 시대의 사고였다. 고려는 국초부터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없어지고, 1227년(고종 14)에 《명종실록》 두 본을 완성하여 각기 개경의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보관했는데, 이것이 해인사 사고의 유래가 된다.
서적을 햇볕에 쬐어서 좀먹는 것을 방지하는 일을 ‘폭서曝書’ 또는 ‘쇄서書’라고 한다. 고려조에는 실록을 삼 년에 한 번씩 말렸는데, 이 일은 사관史官이 직접 내려와 관리 감독했다. 이는 홍애洪厓 홍간洪侃(? ~1304)이 고려 충렬왕 30년에 사서史書를 말리러 해인사로 가는 추옥섬秋玉蟾을 전송하는 시의 주註에 “고려에서 일찍이 해인사 가운데 역대 실록을 간직했는데, 사관으로 하여금 역말을 타고 가서 삼 년에 한 번 볕에 말리게 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성주로 옮겨 보관했다.(高麗嘗藏歷代實錄于此寺中 令史官乘驛 三年一焉 本朝移藏于星州)”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홍애는 이 시에서
인간풍일불능도人間風日不能到 속진의 바람과 해가 도달하지 못하는 곳
보서옥첩여운위寶書玉牒如雲委 진귀한 서책이 구름처럼 쌓였네 (중략)
요지삼한이십삼대지실록遙知三韓二十三代之實錄 멀리서 알리라 삼한 이십삼대의 실록을
일일흔람운산중一一攬雲山中 일일이 구름 가린 산중에서 높이 들겠지
라고 읊었고, 이후로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1295~1359)도 쇄사하러 해인사로 가는 사관 최덕성崔德成을 전송한 장편시 가운데
운시삼재미도처云是三災未到處 삼재가 이르지 않는 곳이라 하니
삼한문적장기간三韓文籍藏其間 삼한의 문적 그 사이에 간직했네
라고 읊었다.
우리는 이상의 시를 통하여 당시 해인사가 사고로서의 조건이 훌륭히 갖추어져 실로 많은 삼한의 역사 문적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조선 태조 7년(1398) 5월에 대장경판이 해인사에 안치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