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소년이던 그 가을, 나는 백양사의 가을산에 취했고 그 거룩하신 부처님에 취했고 스님네들에게 취했다. 안내하던 스님이 들려 주던 ‘생로병사’에 대한 얘기가 마음속에 깊이 남았던, 가을 수학여행길에서 나는 ‘아, 좋다. 나, 이리 올란다’ 그렇게 출가의 뜻을 내고 말았다.
그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모든 것 팽개치고 절로 들어오기까지 백양사의 아름다운 산과 황금 부처님, 그리고 안내를 해주던 스님의 모습에서 마음이 떠나본 적이 없다. 이미 백양사는 꿈속의 고향처럼 그렇게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저 어릴 적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느 새벽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막내는 신병을 끌어안고 살 사주이니, 필경 제 명대로 살기 어려운 놈이야. 그러니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절도 있는 생활을 하며 살던가, 아니면 의사가 되어 제병을 고치고 살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해줘야 할거야’ 하시던 말씀을 무심코 들었던 것이 출가에의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식구들 아무도 모르게 백양사에 들어왔더니, 부모님의 허락서를 받아올 것과 내가 먹을 양식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불교를 좋아했고 승려 되는 것을 말리지 않을 부모님이었으나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리 만무하여, 그 길로 대서방으로 가서 승낙서를 만들고 도장을 하나 새겨 찍었다. 그리고 그달치 하숙비로 쌀 한가마니를 사서 다시 들어왔더니 총무 스님이 놀라는 눈치였다. 1960년대 초, 그렇게 백양사에서의 내 행자시절은 시작되었다.
나는 행자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않아 강원의 대중방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수계를 해야 강원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수계를 하지 않은 내가 그런 특별 경우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어른 스님들에게 ‘저 아인 중 노릇할 애다’라고 보였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내겐 이 길밖에 없다’는 나의 확고한 결심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으리라.
강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나는 불교의 수승함을 직감했다. 속가의 아버님이 한학자였던 데다가 형과 누나들이 보던 책이 많았던지라 철학은 물론 문학서적까지 두루 읽었던 내게, 절에서 배우는 것은 세상엔 전혀 없는 학문이요, 사상이요, 과학이었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했고 심취한 만큼 공부에 몰두했다.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사상이 불교의 공空사상과 접목되었다면 이상적인 무엇을 싹 틔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절에 꼭꼭 숨어 있던 나를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다가, 나중에 식구들이 찾아내어 세상 밖으로 다시 나가 학교에 다닐 때도 불서에 심취했던 것이나, 학교생활을 마치고 다시 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행자시절 불교이론의 뛰어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저녁 아홉시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엉덩이 한번 붙일 사이 없던 행자시절을 보냈다. 봄·가을이면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과 여행객들의 밥장사 뒤치다꺼리에 밤 12시까지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했고, 자다가도 부르면 달려나가 상을 차리곤 했다. 여름과 겨울엔 산감을 보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경사가 심하고 악산인 1300여 정보나 되는 백암산을 타고 나면 코피가 터지기 일쑤였다.
그 시절 백양사는 참 먹고 살기 힘들었다. 가장자리가 오그라진 조그만 양재기에 손가락 한 마디쯤 들어가게 서홉 밥을 퍼주면 그걸 달게 먹었던 시절이었다. 파리가 밥알 사이를 뛰어다닐 수 있게 푼 밥 한 그릇을 뭉치면 한 주먹 밖에 되지 않았다. 봄·가을에 여행객들의 상에서 남은 밥을 솔잎을 따다가 쪄서 함께 버무려 항아리 속에 넣어 놓으면 밥알이 변하지 않았는데, 그걸 겨울과 여름에 꺼내어 죽을 끓여먹곤 했다. 그렇게 한솥밥을 먹으며 공부했던 열다섯 명의 도반 중엔 전 백양사 주지였던 지선스님과 포교원장을 지낸 암도 스님이 있었다. 나보다 한 해 먼저 온 지선 스님은 염불하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고 얼굴도 지금보다 고왔다. 스무살 미만이었던 우리들보다 나이가 많았고 이미 불교공부를 많이 하고 들어온 암도 스님은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포용력이 넓어 우리에게 끼친 영향도 컸었다.
행자시절 나는 정신적인 고뇌가 있을 때면 아무도 몰래 대웅전에 들어가 촛불 하나 켜놓고 기도를 하곤 했다. 깊은 밤 가만히 앉아 기도를 하고 나오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번뇌하고 고민했던 부분들이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기도라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으로 법당문을 나오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어디 조용한 섬 같은 데 가서 한 관문을 뚫을 때까지 박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는데, 행자시절엔 물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생각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살아보니 그렇다. 꼭 생각대로만 살아지는 게 아니다. 이제 공부 좀 해야겠다 싶으면 다른 일이 생기고, 또 반연을 많이 짓다 보니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공부복이 없었지 싶다. 그러나 올해 주지직을 내놓으면 토굴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할 생각이다. 관문을 뚫든 그러하지 못하든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비로소 저 행자시절에 뜻한 바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지금 출가하는 행자들에게 사십여 년 전 그 시절처럼 생활을 하라고 하면 남아 있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고 절집의 풍속도 변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할 게 있으니, ‘하심下心의 완성’이 그것이다. 행자 때 아집을 놓지 못해 하심이 안 되면 승려가 되어도 그는 반드시 어디에서든 자신이 있는 자리를 시끄럽게 한다. 아집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어 하심이 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승려가 될 수 없다.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던져버리고 상대방 기준에 맞게 사는 것이 행자생활의 기본이다.
행자시절만큼 하심을 단련하기에 좋은 기간은 없다. 시비를 분별할 자격이 없는 시기가 행자시절이기 때문이다. ‘나는 없다’라는 생각으로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자체가 하심을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행자시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 만신창이가 되도록, 바보가 되도록 참는 인욕행을 익히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하심과 인욕행을 실천해야 하는 주지의 자리도 행자와 같은 위치인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뜻밖에 저 하심과 인욕행을 익히고 실천했던, 그리고 순수하기만 했던 행자시절을 다시 경험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
내가 있는 백양사에선 근자에 서옹 노스님을 모시고 ‘참사람’ 운동을 벌이고 있다. ‘참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청정무구한 본래 마음자리를 깨친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참사람’이 되자는 것은 부처가 되자는 것이다. 참사람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렵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5분에서 10분 정도 화두를 들고 명상해보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신심이 도태되지 않는다. 나쁜 짓도 하지 않는다. 이를 매일 행하는 사람은 참사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행자시절은 그 끝없는 항해의 첫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