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 땅에 청량산이 있다. 기암괴석이 이룬 열두 봉우리의 절경이 이름만큼이나 맑고 밝은 산이다. 명산에는 명찰이 있기 마련, 산 깊숙이 산을 그대로 빼닮은 청량사가 있다. 십이봉은 마치 꽃잎이 꽃술을 외호하듯 절을 감싸안고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청량사에는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산과 함께 절을 지키고 있는 지현 스님이 있다. 오늘의 청량사를 이 모습으로 있게 한 스님이다. 그 모습 또한 산처럼 맑고 밝다.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절 청량사
해발 600미터 고지에 위치한 청량사의 아침은 발 아래 골골이 스며 있는 운무와 함께 시작된다.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절”, 시인의 감성을 지닌 청량사 지현 스님은 청량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청량산을 배경으로 해마다 한 차례씩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지난해에는 ‘천년의 미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에 이어 올해는 ‘천년의 소리, 천년의 울림’을 주제로 ‘최소리와 자연인’을 초청해 전통리듬과 춤사위에 기초하여 서구적인 감각으로 두드려대는 두드락(Doodlock) 공연을 했는데, 이 작고 오르기 힘든 절에 7천여 명의 관객이 모여들어 법당 난간 등에까지 걸터앉아 관람하는 장관을 연출했으니.
기암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지형 탓에, 맨 아래쪽 탑 앞에 무대를 차리면 잔디를 깔아놓은 경사면이 좌석이 돼, 자연스레 원형극장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봉마다 조명을 비춰 환상적인 무대를 연출했다. 한동안 봉화는 물론이고 중앙의 방송과 신문에까지 청량사 산사음악회는 화젯거리였다.
지현 스님은 이렇듯 모든 이들에게 산사의 산내음을 전달하려 애쓰는 이다. 꽃술의 꽃가루를 온 세상에 퍼뜨리려는 듯.
기도 위해 폐사나 다름없는
청량사를 자원한 지현 스님
요사채 자리 삽으로 파는 데만 1년 6개월이
청량사에 와본 이들은 한결같이 어떻게 이리도 아름다운 자리를 찾아내 이토록 절묘하게 절을 앉혀놓았을까 하며 감탄을 연발한다.
그러나 지현 스님이 이 절에 처음 왔던 10여 년 전만 해도 청량사는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수려한 자연경관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부처님 처소는 엉망이어서, 폐사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사중에는 돌보는 이 없이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유리보전만이 퇴락한 채 덩그마니 놓여 있었고, 한참 떨어진 금탑봉 중간 절벽 아래 응진전이 비슷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연만 아름답다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산문이 조화롭게 서야 인적이 드나드는 법.
버려진 고찰이 어디 청량사뿐이었을까. 지금도 시골 절은 유지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당시는 어려움이 더 했으니 누구나 회피하기 마련이다.
1986년이던가, 지현 스님은 기도할 장소를 찾고 있었다. 9살에 동진출가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신심이 들쭉날쭉하는 자신의 모습을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일 스님은 임명장을 주시며 “애기가 어찌 거기서 살겠나?”하시며 몹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시더니 1주일쯤 지나 사탕 사갖고 손수 절로 오시기까지 했다.
4시간을 걸어들어가야 했다. 몇 해 전 36번 국도가 생기고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차량 절대 들어오지 못함”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곳부터 한 30분은 걸어야 하지만.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생활하다 보니 아침이면 늘 코밑에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목탁 치며 기도하는 일 이외에는 할 게 없었다. 지현 스님은 자신의 생애에서 그 때만큼 기도를 열심히 한 적은 없었단다.
그리고 동시에 부처님이 계신 가람을 방치할 수 없어 정비를 시작했다. 기거할 요사채도 필요했다. 그런데 요사채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 법당보다 1m가 높아 그것을 삽으로 파는 데만 1년 6개월이 걸렸다. 3시간을 걸어가 자재를 실어날라 건물을 짓고, 침목으로 계단을 만들고, 경사진 비탈에는 잔디를 깔았다. 그 곳이 산사음악회 때 멋진 좌석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아름다운 절 청량사가 이룩됐다. 절 어느 한구석 돌 한 조각까지 지현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찾아가는 불교’를 기치로 관을 빌려 법회 시작
절 아래 사하촌에는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다.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반상회도 참여하고 풀 깎는 일도 도와주고, 지나다 밭을 메고 있으면 함께 밭을 메기도 했다.
89년에는 중고 트럭을 한 대 샀다. 장날이면 마을 사람들을 싣고 장에 가서 장을 본 물건들을 실어날라주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사람들은 순진해 마음을 주는 만큼 신뢰와 믿음으로 되돌아온다. 그들이 바로 청량사의 불사에 큰 역할을 한 ‘청량사 특공대’라고 스님은 명명한다. 만약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많은 짐 어찌 혼자 나를 것이며, 어찌 혼자 나무를 해댈 수 있었을까.
자연스레 법회가 시작됐다. 법회 한다고 절까지 오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갔다.
스님은 이해하기 쉽게 ‘출장법회’라 한다. 기다리는 불교에서 찾아가는 불교,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지현 스님의 포교지론인 듯하다.
불교포교를 위해 먼곳을 찾지 않았다. 바로 아래 사하촌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재산면, 명오면 등 몇 개 면이 법회 구역이다.
마을마다 회관이 있었다. 그런데 면 회관이 생겨나자 마을회관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 텅 빈 공간을 2만원에 임대해 부처님을 모셔놓고 법회를 보기 시작했다.
농촌 사람들의 일과는 보통 어두워져야 마쳐진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몸을 씻고 밥 먹고 하면 8시를 훌쩍 넘기기 마련. 그래서 법회는 밤 9시에 시작이다.
법회 시간이 다가오면 곳곳에서 “털털털털” 경운기 소리가 들리면서 회관 주변에 20~30대의 경운기가 몰려온다. 농촌사람들은 스님이 내려온다고 하니 미안해서도 꼭 나오는 정성을 보인다. 마을마다 돌아가며 떡을 해와 나눠 먹기도 하고 마을별로 정보교환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끝나고 나면 보통 12시, 1시를 훌쩍 넘길 때도 있다.
영주에 불교회관이 생기자 법회는 그 곳으로 모아졌다. 어린이법회는 매주 한번, 일반인들은 매월 1회이다.
법회는 한몫에 몰아 보지 않는다. 30~40대 중심의 신행회가 있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는 다회, 20대 후반 젊은 층이 주를 이루는 연화회, 40대에서 50대 초반으로 어려운 부분을 해결해 주는 무량회, 가장 뒷전에서 후원해 주는 청량회 등 세분화해 단순히 법회만 보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과 친목을 함께 도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법회라는 것이 스님을 통해 부처님 말씀을 전해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나름대로 친목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불교회관이 없어지자 어린이법회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잠시 중단한 상태다. 일반법회는 신도가 하는 예식장을 임대해 법회를 유지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포교당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이 모두 한데 모이는 날이 있다. 매월 약사재일과 초하루, 백중, 칠석, 동지 등 중요행사 때는 절에서 법회를 본다. 그래서 보통 방생 때는 40여 대의 버스가 각지에서 모여든다.
지현 스님이 처음 청량사에 가서 첫 초파일에 켠 등의 수가 20개 였다. 그런데 올해 초파일 등의 개수는 3천개를 넘었다.
이제 청량사는 10여 년 전 폐사 직전의 퇴락한 고찰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지현 스님의 찾아가는 불교포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죽령터널 기념마라톤을 장애인과 함께
지난해에는 장애인복지관을 위탁받았다. 영주시 복지관은 7개. 그 중 6개가 기독교 계통이고 불교에서 유일하게 위탁받은 것이다.
복지관은 조계종 영주·풍기·봉화 사암연합회가 공동으로 위탁받은 것으로 지현 스님이 관장을 맡고 있다. 복지관 뜰에 국기, 시기市旗와 함께 만자卍字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고 불현듯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오름을 경험했다. 스님은, 복지란 한 발 나아간 불교포교라고 말한다.
복지가 천주교나 기독교의 고유영역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불자들이 봉사의 터전을 마련해 준 셈이다. 또 종단문제로 스님들에 대한 불신도 불식돼 가고 있는 중이다. 산중의 몇 십억 불사보다 복지관 하나 운영하는 것이 포교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지현 스님은 생각한다.
지난 8월에는 죽령터널 개통 기념 마라톤에 장애인들과 함께 참여했다.
참가할까 말까 고민하다 등록시기를 놓쳤다. 선착순 1천명이 기준이란다. 경품·머리띠 모두 포기하고 참여하는 것에 의의를 두겠다고 하고 시각장애인, 휠체어장애인, 정신지체장애인 50명이 참가를 했다. 스님과 자원봉사자를 합하면 80명.
왕복 10km. 일반인들은 1시간 반이면 되는 거리를 장애인들은 4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마지막 장애인이 도착한 순간 엄청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이후 영주시민들과 불자들의 불교에 대한 이미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른 복지관은 자원봉사자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인데, 장애인복지관에는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이가 넘쳐난다. 후원도 넉넉하다.
회향할 대상을 찾지 못했던 불자들이 마침내 회향처를 발견한 것이다.
‘포교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구나.’ 지현 스님은 요즘 포교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키우고 있다.
사람은 자연을 닮고, 자연은 사람의 영향을 받듯이
<좋은 벗 풍경소리>라는 곳이 있다. 어린이찬불가를 만드는 곳이다. 지금까지 600여 곡의 찬불가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지현 스님은 그 곳의 총재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라 하여 지자체의 예산감시운동을 펼치는 시민단체가 있다. 지현 스님은 거기 공동대표직도 맡고 있다.
지현 스님의 활동내용을 죽 듣고 살펴보자니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 뽑아져나오듯 그칠 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는 법이 없는 성격임을 스님이 꾸며놓은 청량사 홈페이지(www. cheongryangsa.org)에 들어가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법종 스님이 은사인 지현 스님은 은사의 은사이신 소천 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돌아가시기 전 스님 시봉을 할 때 소천 스님은 가끔 이렇게 물었단다.
“지현아, 머리 만져 보았느냐?”
당시는 그냥 무심코 “예!”하고 답하곤 했다는데, 열반하시고 한참 후에 문득 머리를 만지며 깨달았다. ‘항상 출가 본분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었구나 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문득문득 그 말씀이 떠올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기도 하고, 법당에 들어가 안하던 절도 해 본다고 한다.
스님의 마음도 청량산만큼이나 맑고 향기롭다.
점점 더 자연을 닮아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