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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덩어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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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 사상 - 인경 2002년 12월 250호
화두 참구법

화두의 기본적 의심은 공안이 가지는 개념적인 모순이나 논리적으로 회통할 수 없는 갈등에서 비롯된다.

대혜의 《서장》에서는 공안으로 무자無字는 약 11인, 간시궐乾屎은 3인, 시심마是甚는 1인, 방하착放下着이나 수미산須彌山은 1인에게 권한다. 남송南宋의 대혜는 유독 무자화두를 많이 강조했지만, 이후 원元시대에 들어가면서 무자는 모든 화두를 대표하는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공안의 갈등구조가 개인에게 내면화되지 않는다면, 수행의 한 방식으로 간화선은 실제적인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간화선의 의미는 이야기로서의 공안보다는 개인의 삶에서 분명한 문제의식으로 살아 있는 화두에 있다.

그렇다면 화두에 대해서 의심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 의심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해답을 구하는 대신에 반대로 화두의 기능은 개념으로 해답을 찾으려는 마음의 그 자체를 확철하게 자각함으로써 무력화시킨다.

이를테면 대혜는 <자신이 타고난 근기가 우둔하여, 깨닫지 못했다>는 이보문李寶文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

사대부가 도를 배울 때는 오히려 우둔함에 의지하여 공부해야 합니다. 대체로 지견이 많으면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이 앞서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지견(正知見)이 현전할 수 없습니다. 이 장애는 외부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이것 역시 우둔함을 아는 주인공일 뿐입니다.

다만 우둔함을 능히 아는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是甚)’라고 살펴보기만 하십시오. 이 속에서 살피기만 해야지,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는 마십시오. 살피고 살피다 보면 홀연히 크게 웃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타고난 근기가 우둔하다고 하는 마음은 사량분별이다. 이런 마음은 무엇인가를 구하고자 하나 잘 되지 않는다는 근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별과 근심을 자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마음이다. 우둔하다고 하는 마음은 분별이지만, 그것을 아는 마음은 분별이 아니다. 분별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알아채는 순간, 영리하다든지 우둔하다든지 하는 개념적인 양변을 벗어난 중도中道에 계합한다. 그러나 이것은 ‘옛 그대로의 자기 주인공’일 뿐,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대의 공안에서 의심한다는 화두의 본질은 결국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를 곧장 알아차리는, 분별로부터 촉발된 자기에로의 복귀로서의 회광반조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내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로 되돌아가서 자각한다. 대혜는 <도에 합치하지만, 확 한번 내려 놓지 못하는> 장제형張提刑에게도 같은 조언을 한다.

불법과 번뇌도 외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외적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말고, 다만 이같이 생각을 일으키는 자는 ‘어디서 오는가’ 라고 회광반조 하십시오. 오랫동안 이렇게 하면 활쏘기처럼 자연히 적중할 것입니다.

불법과 번뇌는 분별적인 마음의 양변이다. 이것은 마음이 만들어 놓은 사량분별의 거미줄인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이것이 무엇인가’ 혹은 ‘이것은 어디서 오는가’라고 질문함으로써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궁극의 일구一句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다. 이것이 화두 참구법이다.

그러나 화두도 또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상속심相續心에 빠져 흘러가 버릴 수도 있다. 분별적인 양변에 어느 사이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화두는 몸뚱이의 일부가 되고, 의심의 덩어리로 가슴에 자리잡아야 비로소 수행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대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자리>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밀고 나가길 요구한다.

한번 시험삼아 사량분별하는 마음을 무자화두無字話頭로 돌려서 사량분별해 보십시오. 홀연히 사량분별할 수 없는 곳을 향해서 이 한 생각을 타파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삼세를 요달하는 자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화두를 드는 곳에서 이해를 내지 말고 사량분별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일념으로 사량할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 사량하면 마음이 갈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만약 뜻을 둘 수도 잡을 수 없고 오히려 이치의 길이나 뜻의 길에서 심의식心意識이 전혀 없어서 목석과 같을 때, 이 때 공空에 떨어질까를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곳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곳이니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의심한다고 하는 것은 <사량분별이 끊어진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뜻 길과 마음의 길이 끊어져 재미도 없고 잡을 수도 없어서 마치 목석과 같은 자리이다. 의심하지만 대답할 수 없는, 그것은 논리적인 분별을 일체를 배제하기 때문에, 이 피할 수 없는 자리는 마치 소뿔 속의 쥐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경험이며, 공空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만 의심의 덩어리일 뿐이고, 철벽이 앞에 가로막힌 형국이다.

그러나 이 경절徑截의 팽팽한 긴장을 통해서만이 화두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야 어느 날 홀연히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는> 경절의 커다란 깨달음이 있다. 이 때를 대혜는 <확 한번 자신을 내려 놓는다> 혹은 어둠이 <확 터져 난다>는 뜻의 분지일발噴地一發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므로 화두 참구는 공안상에서의 의심, 회광반조, 피할 수 없는 자리에로 직면, 분지일발이라는 내적 과정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맺는 말

간화선은 간화看話에 의한 참선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란 말 그대로 이야기(話)를 지켜본다(看)는 뜻이다. 여기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불조가 도에 들어가는 인연이나 기연을 보여 주는 고칙古則이나 공안公案을 말한다. ‘이야기를 지켜본다’고 하는 간화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불조가 도에 들어간 이야기인 선문답의 존재가 전제된다. 이야기를 지켜보기 위해서는, 지켜보는 대상으로서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먼저 도에 들어가는 인연으로서 고칙공안古則公案이 먼저 성립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수행의 방법으로서 화두話頭라는 참선법이 발전되었다.

원오悟뿐만 아니라 대혜大慧시대는 이미 고칙공안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말하자면 간화선이 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공부의 방법으로써 널리 알려져 있었다. 원오나 대혜가 깨닫는 경우를 모델로 하여 볼 때, 간화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①임제의 경절의 가풍을 계승하고 있으며, ②선대의 언구를 의심함으로써 사량분별을 끊어서, ③궁극의 일구에 직입直入하는 공부법이다.

임제의 가풍은 곧장 진리를 보는데 있어 사정을 두지 않는 단전직입의 경절처에 기초하고 있다. 대혜는 스스로 임제종의 양기파을 잇고 그 가풍을 일으키는 데 의식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경절은 돌아가지 않고 곧장 가로질러 간다는 뜻이다. 대혜에게 있어 사정을 두지 않는 경절의 가풍은 돌아가는 길에 대한 혹독한 배척인데, 안으로는 불교계 내부의 묵조선照禪에 대한 격렬한 부정으로 표출되었고, 밖으로는 사대부의 총명이근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적극적인 사회적인 참여로 나타났다.

간화선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적인 요소는 의심함에 있다. 고칙 공안이 제기하는 일구를 의심함으로써 비로소 객관적으로 저기에 던져진 공안은 비로소 실존의 문제로서 닥쳐오고 심각한 생사의 해결과제가 된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유산으로 남겨진 판례로서의 공안과 수행하는 개인에게 내면화된 문제로서의 화두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이런 구별은 간화선의 진정한 의의가 결국 공안보다는 화두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간화선의 특징을 일반적인 철학적 용어를 빌려서 정리한다면, 경절의 가풍은 간화선이 현실 속에 작용하는 현상론이며, 궁극의 일구는 간화선의 철학적인 존재론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의심함은 일구를 깨닫고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실천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