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인연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꽁트 - 김호운
1990년 09월 103호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민욱은 합장을 하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이 순간이면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일순 정지하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6년전 겨울 어느 날 만난 한 비구니스님의 얼굴이 연꽃모양으로 머리속에 살아올랐다. 그가 전국의 사찰을 여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스님을 만난 인연에서 출발한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더구나 대구 지방은 분지여서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몹시 춥다.
승차권 반환창구에 근무하는 역무원(驛務員)인 민욱은 저녁 10시가 넘어 그날 반환한 금액을 집계하고 있었다. 집계를 거의 끝내 갈 무렵이었다. 우연히 대합실을 내다보던 민욱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있는 한 승객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그가 그 승객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넓은 대합실에 혼자 앉아 있었기도 해서였지만, 여느 승객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잿빛 승복을 입은 비구니였던 것이다. 깎은 머리에 파란빛이 도는, 속가의 표현으로 정말 옛되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난방이 들어오고 있었으나 바깥 날씨가 워낙 추워 대합실엔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추위가 몹시 괴로운 듯 털실 목도리에 목을 깊숙이 감추고 있었다.
민욱은 난방이 잘 들어오고 있는 사무실에 모셔다 쉬게 하고 싶었지만, 여승이라는 사실 때문에 공연히 망설여졌다.
하던 일을 계속하던 민욱은 자꾸만 신경이 대합실 쪽으로 쏠렸다.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왜 스님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
민욱은 순간 원인을 발견했다. 그 스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일순 정지하고 있었다. 왜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그래, 바로 그거다. 그는 마치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솟구치는 희열을 맛보았다. 자신의 의식을 한곳에 머물게 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한 것으로 보여진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의 변화가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민욱은 용기를 내어 하던 일을 멈추고 대합실로 갔다. 민욱이 다가서는 것도 모르고 스님은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
민욱은 어떻게 말을 건네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스님이 눈을 떴다. 민욱은 순간 몹시 당황했다. 몰래 모습을 홈쳐보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민욱은 빨리 무슨 말이든 건네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열차를 기다리십니까?”
“네.”
“어디 가시는지, 지금은 차가 다 끊겼는데요?”
“서울 갑니다.”“서울 가는 차는 새벽 두 시가 첫찹니다.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어요.”
“고맙습니다. 그 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욱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괜찮으시면 저희 사무실에서 기다리시죠. 새벽 두 시에 교대를 하는데, 그때까지 제가 일을 보고 있습니다.”
스님은 망설이는 듯하다가 합장을 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민욱은 스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가운데 사정을 대강 알게 되었다. 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승인데 몸이 아파 속가(俗家)에 요양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승려가 된 내력이 궁금했다. 그런 걸 묻는게 실례인 줄 알면서 그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스님은 의외로 조금도 주저없이 대답해 주었다. 본래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출가(出家)한 오빠의 영향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욱은 잿빛 승복 대신 하얀 간호원 복장을 한 스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만 인생의 진로를 바꿀 수 있다는 용기가 존경스럽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반환창구에는 두 사람이 근무했다. 다른 한 사람은 야간교대를 하기 위해 가까운 곳에 있는 자기 집에 가서 쉬고 있었다. 스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들락거리며 농담을 던졌던 것이다. 어떤 직원은 듣기에 거북할 정도로 노골적인 말을 내뱉기도 했다. 민욱은 스님 보기에 몹시 민망했다. 편의를 봐드리려고 사무실에 모셨다가 도리어 욕을 봐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스님을 숙직실에서 쉬게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숙직실은 사무실 안에 붙어 있었다. 동료직원이 집에 가서 쉬고 있어서 숙직실이 비어 있었다. 몸도 불편한데 딱딱한 의자에 앉아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하느니 차라리 그편이 훨씬 낫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말을 건네려고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대합실에서처럼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스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였다.
그때 그는 아까처럼 또 세상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직 차 시간이 멀었는데, 저희 숙직실에서 잠시 눈을 불이시겠습니까? 우리 사무실 전용방이라 다른 사람들의 출입이 없습니다. 저는 교대자가 을 때까지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니 개의치 마십시요”
민욱은 자신이 생각해도 필요 이상이다 싶게 길게 이야기를 건냈다. 스님은 민욱의 멀에l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서 합장을 하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민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스님이 거절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만약 거절을 했다면, 자기의 마음을 스님은 영영 이상히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 있었다.
그때 민욱은 미소를 짓는 스님의 얼굴에서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을 보았다. 그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합장을 하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자신도 몰랐다. 마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기분이었다.
차 시간이 되어 민욱은 스님을 깨웠다. 밖으로 나온 스님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종이 쪽지를 민욱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소승의 오라버니가 상원사에 계십니다. 혹 여행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들르세요. 산사라 넉넉치는 않겠지만 오늘 이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 종이쪽지에는 스님 자신과 상원사에 있는 오빠의 법명이 적혀있었다.
스님을 만난 이후부터 민욱은 눈에 보이지 않게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하루에 한 번쯤 세상의 움직임을 정지시켜 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 순간이면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정신없이 움직일 때는 자기가 어디쯤 서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알지를 못한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자가 환각상태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민욱은 스님이 준 그 쪽지를 분실하고 말았다. 분명히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없었다. 그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한 번 들여다 보았는데도 도무지 두 스님의 법명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짜보아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민욱은 틈나는 대로 사찰을 찾아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 스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꽃으로 다가오던 스님의 미소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민욱은 천천히 일주문을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