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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0년 09월 103호
선재가 사는 마을에는 갈색과 초록빛깔의 버스가 두 대나 있다. 한 대는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해 B지하철 역만을, 또 한 대는 시장 보는 주부들을 위해 B시장을 3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있다.
선재는 아내와 함께 초록빛깔의 버스를 탔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차 안이 붐볐다.
그 여자는 중간 좌석에 앉아 있었다. 짙게 화장을 한 그녀의 얼굴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때 노인 한 분이 그 여자 옆으로 다가갔다. 마치 자리를 양보받으려는 듯한 기세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자 그 여자도 지지 않으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핸드백 속에서 썬그라스를 꺼내 쓰는 것이었다. 어디다 눈을 주고 있기가 불편할 것 같아서 그럴지도 몰랐다.
선재는 힐끗 여자를 노려보았다. 선재는 그 여자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마을 슈퍼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녀는 온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헬스복을 입고 있었다. 그 여자의 유방과 둔부 부분이 유난히 강조되어 보여져 참 민망했다. 슈퍼 주인이기도 한 그녀가 마을에 에어로빅 강습소를 차렸다는데 거기를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선재 옆에 서 있던 몇몇 주부들이 혀를 차면서 불명했었다.
“마을이 자기집 안방인 줄 아나 보죠?”
버스가 막 마을의 비탈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선재는 그제야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어딜 가세요?”
선재는 일부러 할아버지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여자의 귓속을 괴롭혀 주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노인이 허리를 짚으며 말했다.
“심심해서 탔소 젊은이.”
“심심해서요?”
“그렇다니깐. 집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탔다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빈 자리가 없구먼.”
노인은 집에 있는 것보다 버스를 타고 소일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노인에게는 자리에 앉고 서고는 아무 문제가 안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선재는 입맛이 씁쓸하였다. 그때 아내가 선재의 손을 잡아당겼다.
“할아버지, 그럼 시장 법당에서 소일하시지 그래요? 법당은 늘 비어 있으니까요.”
“법당이 어디 노인정인감?”
“그럴 수도 있죠, 뭐.”
선재 아내가 재차 팔을 끌어당겼다. 선재는 아내가 끄는 대로 선 자리를 옮겼다. 모처럼만의 외출인데 가슴 한쪽이 우울해지는 것 같아 선재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 말았다.
그런데 선재 아내는 선재가 그 여자의 모습에 홀딱 빠져 그런 줄 알고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뭘, 보고 있었어요?”
“뭘 보다니, 볼게 뭐가 있다고.”
“수작 부리지 마세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고 있지?”
“그게 수작이 아니고 뭐예요. 할아버지하고 얘기하는 척하면서 저 여자를 흘끔흘끔 곁눈질해댄 걸 다 지켜봤단 말예요.”
선재는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선재가 말을 못하자, 더욱 기세를 올렸다.
“모처럼 법당에 가자고 해놓고선 전 뭐예요.”
“오해를 하고 있구만.”
“둘러붙이지 마세요.”
“둘러붙이지 말라구?”
“그래요, 요즘 당신 수상쩍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선재 아내는 엉뚱하게 비약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제풀에 화가 나 콧구멍을 벌름대고 있었다.
초록빛깔의 버스는 어느새 공구상가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재의 목소리는 낮았다. 기죽은 목소리로 대꾸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기어이 선재는 화를 내고 말았다.
“남편이라는 사람을 그렇게도 못믿어 !”
“호주머니 속에서 나온 찢어진 극장표 두 장은 뭐예요. 그런게 보여도 당신을 믿었다구요.”
선재 부부는 이제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언성을 높여 소리쳐댔다.
“친구끼리 극장에도 못가나!”
“누구하고 가느냐가 문제지요!”
“그런 것까지 다 얘기해야 해? 지겨웁게 말이야.”
어느새 아내의 눈가에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이제는 선재가 서둘러 휴전을 제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급한 성격으로 보아 엉엉 울음을 터뜨려 버릴지도 몰랐다.
“그만 둡시다. 그만 둬.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나, 원.”
선재는 스스로 치솟는 화를 꾹꾹 눌렀다. 참자, 참자, 내가 참자. 선재는 일부러 한풀 꺾이는 체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울퉁불퉁한 지면 위에서 버스가 시장 법당으로 들어갔다.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버스가 30분 간격이니까 우리 그 여자 머리 위에 있던 짐이 l시간 후에 여길 나가요.”
“그러지 뭐.”
누군가법당 앞에서 시주돈을 놓고 잠깐 선재 부부는 의견을 조정했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만원 정도는 해야지요”
“부처님이 할 일이 없어 불참자 벌금이나 계산하고 계신 분인줄 알아?”
“그래도 마음이 쩡쩡해서 그래요.”
할 수 없이 선재는 아내에게 양보를 했다.
“당신 마음이 편해진다면 아까워할 이유가 없지.”
“고마워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선재 아내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처님한테 복을 듬뿍 받은 사람처럼 그랬다.
부처님이 단돈 일만원으로 회유당할 분이신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선재는 또 그 여자를 보고 말았다. 그 여자는 또다시 운수 좋게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선재는 신경을 끊었다. 그래서 창 밖으로 눈을 주었다.
버스가 도로 공사장 부근을 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울퉁불퉁한 지면 위에서 버스가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그 여자 머리 위에 있던 짐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싱싱한 오이들이었다. 선재 등뒤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 오이 맛사지 한 번 잘하는구먼.”
선재는 아내와 그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킥킥 웃고 말았다.
아내나 그 여자나 엄청난 차이의 사람 같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사람 같기도 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