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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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이현옥
1999년 02월 204호
문화개념이 인간개념에 영향을 미친다는 언명을 주의 깊게 새겨볼 때 한국 여성상은 한국 문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창조되고 형상화된 개념이 라 말할 수 있다. 순종과 인내로 대변되는 한국 여성상은 사실상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를 온전히 유지시켜주는 방패 역할을 해왔다. 의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점은 더구나 우리 문화의 중핵적인 측면을 은폐하고 문화적 퇴보와 위축을 부추겨왔다. 여성에 관한 가치 평가, 법률과 제도의 변화추이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우리사회에 내재해 있는 여성상에 관한 왜곡된 실상은 실제의 모습과 유리된 역사의 일부분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삼국시대는 여성의 생산력과 다산을 상징화하여 지모신地母神이나 시조신으로 숭상하며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신라는 특히 이러한 면모가 그대로 잘 간직 된 나라였다. 모계적 혈통을 중요시했던 신라고유의 풍습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기준에 따라 평가하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선덕, 진덕, 진성과 같은 뛰어난 세 여왕과 신이한 여사제나 왕후가 배출되어 백성의 신망과 존경을 받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화랑도花郞徒의 전신인 원화源花가 여성이었던 점, 또 불교 승관제도增官制度의 최고 통솔자인 승통增統 다음에 도유나랑都維那이라는 비구니 교단을 통솔하는 직책을 두었던 점을 볼 때 여성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꽤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천한 여종의 신분이라는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성불할 수 있었던 미타사彌陀寺 욱면都面의 설화에서 성과 신분의 차별 없는 불교적 토양이 확고히 자리잡은 나라였음을 알게 한다.
삼국시대에 견주어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지위가 한결 고양되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여성에 관한 제도나 법률이 정비되면서 사회적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결혼에 있어서 귀족들은 엄격한 신분질서를 유지하였으나 고려의 평민들은 삼국시대에 못지않은 자유혼의 풍습이 여전히 유지되었다. 자유혼뿐만 아니라 이혼까지 쉽게 이루어졌으며 배우자와 사별한 뒤 부인의 재가再嫁는 전혀 문제시 되지 않았고 삼가三嫁까지 가능하였다. 여성의 재가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처 소생의 자식들이 부모가 재혼 뒤에도 신분이나 상속상의 제약을 전혀 받지않기 때문이었다.
또 상속의 경우, 부모를 공양하는 장자가 우선 순위였으나 그 외에는 딸과 아들의 구별 없이 균등 상속하였으며, 남아선호사상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를 봉양하고 가문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지식에게 더 많은 재산을 상속하였다. 제사도 반드시 장자의 소관이 아니라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할 때는 자식들간에 일정 기간 동안 맡아 제사를 지내는 윤행輪行을 행하였다.
그러나 고려후기 원나라의 칩입과 내정간섭은 고려의 정치권력 구조나 생활문화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본격적으로 유입된 주자학朱子學으로 인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격하되었다. 특히 삼재가三再嫁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가장한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의 풍습은 여성에 대한 억압을 부추기는 등 부정적 측면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말부터 여성에 대한규제가 강화되고 더욱이 정치이념과 밀착되면서 여성 차별의 문화를 서서히 형성하여 조선조 지배계층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조선왕조는 고려 후기의 사회적 부조리와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한 방편으로「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하여 부모에 대한 효순孝順과 신불사이군톰臣不事二君과 더불어 여불경이부女不更二夫에 윤리목표를 두고 여성을 제도적으로 억압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차별적 성문화를 이루어 갔다. 또 삼강오륜三綱五倫, 삼종지도三從之道, 칠거지악七去之惡과 같은 규범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요구를 정당화하는 데 부합하는 이론체계로서 한몫을 차지했다. 태종은 1406년에 양반의 정처正妻로서 삼가三嫁 및 실절失節한 부녀의 자손은 문과나 소과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여성의 정절에 대한 의무를 법제화함으로써 가족 질서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쾌 낮추었다. 여성 차별이 합법화되었으나 엄격히 시행되지 않다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여성의 권리는 본격적으로 규제받게 되었다.
재산상속의 경우, 중기 이전까지는 남녀균분이 원칙이었으나 엄밀하게는 6대 5의 비율로 본처의 자녀와 양·천첩 자녀 사이에 차등을 두었다. 이 규정을 어겨 재선울 독점하거나 이미 분배된 상속 재산을 점거한 자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자녀균분제는 부와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균형된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이러한 재산상속제는 출가한 딸에게도 재산을 균둥하게 분배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 자식 없이 사망한 부인의 노비는 남편이 그대로 승계하되 남편이 재취再娶하면 다시 부인의 친가에 되돌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1670년 이후부터는 아들딸을 구분하는 자녀차별 상속이 시행되고, 1800년 후반기 이후에는 장자 우대 불균등 상속이 시행되었다. 이와 같이 남녀 균등 상속이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결혼 뒤 일정 기간 처가살이를 하던 남귀여가男歸女家의 혼속을 폐지하고 결혼 뒤 곧바로 시댁으로 가는 친영親迎을 행하게 하여 가족 내에서의 여성 지위를 낮췄기 때문이다.
한편 제사 상속에 대하여 살펴보면, 초기에는 장자봉기長子奉祝를 원칙으로 하였지만 재산 상속이 자녀 균분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서 제사를 받드는 윤회봉시輪廻奉祝가 조선 중기까지 일반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후에 아들과 손자 등 직계 남자에게만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여자들은 제사의 주관이나 상속에서 제외되도록 법제화하였다. 이와 같이 18세기 초부터 여성들은 실질적으로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되었으며, 상속상의 지위도 격하되면서 남존여비사상이 확고한 전통으로 뿌리 박히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상만사에 대한 순종과 인고가 마치 한국 여인의 미덕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수동적이면서 순종적인 이미지로 남게 된 한국 여성상은 조선의 통치이념이 만들어 낸 조선 중기 이후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역사의 왜곡은 발전적이면서 창조적인 문화의 창출을 막고 도리어 한국 여성상을 오도하고 파괴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이전까지 한국여성은 결혼과 이혼이 대체로 자유로웠으며. 법제상 재산과 호주상속에서 남자와 거의 같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주체적 삶을 영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우리의 전통 여성상은 왜곡된 한국문화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는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을 수 있다. 또한 소외계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여성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한국문화의 포용성과 잠재력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