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시나브로 깨어오는 빛이 동쪽 하늘에서부터 밀려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들의 좌복을 들고 선방으로 향했다. 어둠 속을 지나면서도 학인 스님들은 누구 하나 말이 없다. 꽉 찬듯 하면서도 텅 비어 있고,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찬 듯한 선방 분위기가 처음인지라 무척 긴장한 탓이었을까? 앞 벽면에 부착된 용맹정진 시간표의 그 빡빡함이 더욱 주눅들게 한 모양이다.
50분 좌선하고 10분 포행하는 소림원 앞에 이미 여름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뜰 앞에 매미가 소리 높여 울어대고, 밤낮 없이 번뇌 망상을 떨쳐버리고 대자유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살아 숨쉬는 현장 - 그 선원 앞으로 남산의 푸르른 산자락이 한 경계의 현란함을 더해 준다.
처음 하는 참선 수행이라 그런지 무력감과 육체에 가해오는 고통 때문에 무척 난감했다. 전신이 저리고 아파오는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수면욕과 망상심에는 대책이 없다. 하루 18시간 30분을 꼬박 이렇게 앉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동안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벌써부터 퇴굴심이 들어 어쩌나 내심 걱정이 된다. 수행이라는 게 마음만 가지고는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신심信心을 받쳐주는 강한 체력이 뒷받침되어야겠지.
선문에서는 오로지 견성見性으로 근본을 삼으며 자성을 가린 근본무명인 제 8야뢰야식을 끊어야만 대원 경지에 들 수 있다고 하여 이를 돈오頓悟라고도 한다. 견성見性의 방법은 공안을 참구함이 가장 첩경이라 하여 해마다 학인 스님들은 방장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기 위해 용맹정진에 들어오기 전날 밤에 삼천배 참회 기도를 한다. 치문반 스님들이 받은 화두는 그 유명한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는 선문 속에 ‘마음이 곧 부처’라는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리라. 삼천배 참회기도를 하면서 나는 지금껏 살아온 지난날의 죄를 수없이 자르며 한마음 바로 보기를 염원했었다.
세 번의 죽비 소리가 방선을 알린다.
이튿날.
오늘은 아침부터 졸음이 밀려왔다. 겨우 졸음에서 빠져나오면 그 곳에는 영락없이 분별망상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잡아채곤 한다. 참으로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어디에서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마치 무성영화의 필름을 보고 있는 것처럼 단편들이 수없이 조각나 하얀 벽면에 영상화된다.
나는 될 수 있으면 용맹정진 기간만큼이라도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선방에서의 정진기간 동안에는 철저히 묵언이 지켜지지만 방선이나 공양시간에는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성인이 말씀하시되 말은 적을수록 좋다고 했다. 침묵이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나 그것을 인내하기란 지극히 고통이란 것을 알았다. 나는 내면에서 끝없이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말은 생각의 형태이고 그 빛깔일 수 있다. 그러므로 생각의 빛깔이 맑고 고요하면 그 말도 맑고 고요할 수 있게 마련이다. 나는 늘 일상 생활에서 말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보다 말을 해버렸으므로 후회했던 일이 더 많았다.
“입은 화의 문이므로 반드시 엄하게 지켜야 하고 몸의 재앙의 근본이므로 경솔히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자주 나는 새가 그물에 걸리기 쉽다. 그러므로 부처는 6년을 설산에서 말없이 움직이지 않으셨고, 달마스님은 소림굴에서 9년을 면벽묵언 하셨다.”
야운 스님의 <자경문>에 나오는 말이다.
장군죽비를 든 스님이 나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딱- 타닥- 딱’
고요가 일시에 갈라지며 그와 동시에 나의 등줄기가 시원하게 아파온다. 수면욕은 정진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였다. 천하장사인들 무겁게 짓눌러오는 눈꺼풀의 졸음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오죽하면 달마스님은 졸음을 이기다 못해 눈꺼풀을 떼어 버렸겠는가. 아픔도 잠시뿐. 나의 눈이 천근의 무게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어둠 속 깊은 곳에 침잠해져 음울한 수은등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기도 하고, 한낮의 매미 소리만큼 가장 높이 올라가 있는 착각을 수없이 하며, 무릇 고통이란 평안과 상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안 속에 고통이 또 고통 속에 평안이 내재해 있음을 느낀다. 갑자기 방바닥이 휘말려와 나를 휘갈겨 놓고 파도처럼 다시 멀어져 간다.
마지막 날이다.
밤 11시 30분 죽공양을 마치고 자정부터는 그야말로 막바지의 용맹정진이 시작된 듯 한치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죽비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일고 오금이 저린다. 벌써 몇 개째 장군죽비가 부러져 나갔는지 모르겠다.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내리치는 장군죽비. 그러나 나에게는 팔만 사천의 번뇌와 일천 칠백의 경계가 육근六根에 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일까? 한 물건이 여기 저기서 울린 죽비소리에 갈라진다. 마치 모든 사물이 꿈속의 그것처럼 확실하지 않다. 한 도반 스님이 옆에서 기력에 못 미쳐 무기력하게 넘어져 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 또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마를 장판에 박는다. 참 이럴 수도 있을까? 어떤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이다.
대적광전 쪽에서 긴 세 번의 목탁소리와 함께 노전스님의 아득한 새벽 도량송이 굴곡을 이루며 들려온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 그것은 또 한번의 출발을 알리는 시작음이다.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몸부림을 알리는 신호음인 것이다.
일주일 용맹정진을 마치고 나서 나는 참 많이도 흘러와 버린 느낌이 들었다. 진정, 출가 수행자는 어떤 모습으로 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어야 할지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본다. 끝없는 자기 부정과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수많은 선지식들. 그들의 출발점 또한 나와 같지 않았을까.
오늘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