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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해인사 그 첫걸음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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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2년 10월 248호
하늘이 멀어지고 바람이 가벼워질수록 시선을 멀리 두게 된다. 해질녘 도량 한 바퀴 돌다 시선을 하늘 끝에 둔다. 하늘 아래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는 아득한 먼 나라 전설처럼 느껴지고 나도 잠시 이 우주 공간을 벗어난 기분이다. 높고 낮은 산, 멀고 가까운 산이 하늘 가장자리에 검푸른 색으로 선을 부드럽게 그어 놓는다. 지그시 눈을 감고 마음은 산 능선을 따른다. ‘참 좋다. 참 푸근하고 부드럽다’라고 혼자 되뇌인다.
마음에 산 그림자를 품고 산 지 오래다. 나도 큰 산 같은 사람, 큰 나무 같은 수행자가 되고 싶다면 우스운 이야길까. 삶에 지친 사람들이 마음 쉬어 갈 수 있는 편안한 쉼터가 되어 주고 싶다. 맑은 솔바람에 화나는 마음, 미운 마음,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교만스런 마음 다 잠재우고, 부나 명예를 향한 목마름도 쉴 수 있는 그런 쉼터 말이다. 뭇 생명이 더불어 사는 산에서 양보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고, 삶에 지치고 목마른 나그네에게 조건 없이 그늘을 베풀어주는 큰 나무에서 보시의 마음을 배우고, 어느 숲이나 칡넝쿨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에서 무소유의 자유를 배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두두물물이 다 다른 빛깔과 모양을 가져서 더 아름답다는 것도 배울 수 있으면 더 좋을 일이다.
두어 달 전 몇 명 불자들이 모여서 좌선하는 모임이 있어 지인의 아파트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요즘은 사람이 사람을 못 믿는 험한 세상이라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심인데도 아파트 입구에 있는 수위실에 무슨 중요한 보안이 필요한 것처럼 출입을 알려야 한다. 몇동 몇호 방문객이라고 알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육십이 지긋이 넘어 보이는 아저씨 한 분과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한 명과 함께 탔다. 그 어린아이가 ‘와 스님이다.’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기에 나는 그 아이 부모님이 얼마나 열심히 절에 데리고 다니기에 이렇게 스님을 보고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는가 싶어 내심 반갑고 기뻤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잠시였다. ‘그래 이 아파트에 사니? 참 착하다. 인사도 반갑게 잘 하네. 엄마랑 절에 많이 가 봤구나.’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아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스님 참 불쌍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왜 스님이 불쌍하니?’라고 물었다. ‘왜 예수님 안 믿고 머리 빡빡 깎고 그렇게 살아요? 마구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저 따라 내일 교회 가실래요? 목사님이 좋아하실 텐데….’라고 덧붙였다.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너 이녀석 스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못써.’라고 말하자 ‘왜요?’라고 당차게 반문하는 그 어린아이에게 대답도 할 사이 없이 엘리베이터는 그 어린아이를 내려놓았다. 그 아이는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서 있었다. 옆에 계시던 아저씨가 계면쩍게 웃으시며 ‘요즘 아이들 참 당돌하지요.’라고 말꼬리를 흘리며 내렸다.
그 날 짧은 좌선 시간의 화두는 온통 그 어린아이의 천진한 얼굴이었다. 누가 그 아이 생각을 마구니 일색으로 물들여 놓았을까. 그야말로 불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어려서 어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한다고는 하지만 아무 스스럼없이 내뱉는 아이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에게 또 하나의 화두 “왜 머리 깎고 사는가?”를 던져준 셈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 남부 터미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안거 해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님들의 이동이 많았던 때였다.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던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버스를 타기 위해서 부지런히 지나가던 스님 세 분을 보더니 ‘엄마 저게 뭐야? 사탄이야?’ 하는 것이다. 그 아이 엄마는 ‘그러면 안 된다’는 말도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 아이들의 태도를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기에는 왠지 부족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어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아이들은 그대로 배운다.
물론 아이들이 자라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자신과 업이 다르고 생각과 이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긴 삶의 여정에서 사람들이 지닌 모양과 빛깔, 향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세상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고, 꼭 그래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아이가 한 인간으로 성장하면서 많은 부분이 결핍되지 않고 다양한 즐거움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바르게 보고 듣고 배우는, 즉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가치관이나 사상이 잘못 정립된 교육자나 지도자, 성직자들이 많은 사람을 멀쩡한 장애인으로 만들기 쉽다. 신체에 장애를 가진 사람만이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치우친 사고 때문에 정신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문제는 자신이 정신장애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삶의 현장 여러 분야에서 자기의 편협된 사고思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언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상대방이 가진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상대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자기 세계가 넓어지고 풍요로워진다는 생각보다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아야 자기 세계를 지킬 수 있다는 피해의식이 알게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의 척도가 세상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닐진대 자기와 다른 의견에 한 쪽 귀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넓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기계문명이 첨단을 달리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사회는 변하고 그에 따라 올바른 가치관이 바로 서야 하는 이런 시점에서 교육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중도적인 삶의 가치관과 삼라만상이 다 독립된 존재이면서 서로가 연기의 법칙 속에 상의상관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사람 개개인의 근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교육되어져 알기보다는 터득해서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세상이라는 이 넓은 교육장에서 말이다. 그러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담보해야 하지만 먼저 앞서야 할 것은 열려 있는 마음 자세일 것이다. 마음이 열려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 해도 모두 그 안에서 생겨나고 변하고 소멸되지만, 마음이 닫혀 있으면 고립된 자아만이 존재할 뿐 아무 것도 그 안에 수용할 수가 없다.
이 시대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하기에 안성맞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가 개산 천이백주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새삼 의미가 크다. 단순히 천이백년이라는 세월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법보종찰다운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 천이백년 전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펴고, 부처님 제자들의 선불장이 되고자 했던 그 첫 걸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히 법과 수행정신은 사라지고 의식만 남았다고 불교를 폄하하는 이 시대에 법보종찰로서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로 삼을 일이다. 장경각 경판에 새겨져 천여년 세월을 인내한 부처님 말씀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그 역할보다는 생생하게 대중의 생활속에 실천되어 중생의 마음 속에 깃든 부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 이제 그것은 우리 세대의 몫으로 남았다.
부처님의 세계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중생의 세계에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다. 그 시작을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가 늘 고민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법보종찰 해인사의 개산 천이백주년을 베토벤의 심포니 5번으로 감축하고 싶다. 1악장 제1테마의 4음, 마치 가야산의 일주문을 두드리는 뭇 생명들의 외침 같은 멜로디로 시작하는 운명 교향곡을 축하곡으로 띄워드리면서 부디 그 외침을 가야산 도량에 계신 부처님과 신장님들이 외면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중생들을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로 제도하는 큰 역할을 기대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