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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일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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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2002년 10월 248호
불영사 일운 스님 쨍 해진 햇살 아래 강아지풀이 씨를 마구 풍기어 내는 것은, 잎이 마르기 시작한 뒤엣 소식이다. 고추에 붉은 물 들기가 두 눈에 천천히 차오르는 눈물과도 같더니, 맏물 고추는 진작에 거두어졌더라 했다. 가을이다. 큰물이 지고 난 곳에도 철은 어김없이 그렇게 바뀌었다.
산 아래 낮은 땅 소식은 그러하나, 아직 이 산중은 어림없다. 불영사 주지 일운 스님 마음이 그러하다. 평생에 그렇게 모진 비는 처음이었다. 시간당 800밀리미터로 쏟아붓는 비에 절을 휘감고 도는 물길을 건네 주던 불영교 다리가 반쯤 떠내려가고, 포장이 안 되어 있던 진입로는 군데군데 유실되었다. 소식 끊긴 절을 염려하여 콩나물, 건전지 따위를 실은 헬리콥터가 불영사 위로 날아들었다. 대엿새 전기선도 전화선도 끊긴 동안, 대뜸 시간은 호롱불 켜고 살던 삼십 년 전으로 되돌려졌지만, 그 와중에 누린 호사가 없지 않았다.
선방이 면해 있는 계곡이 깊기로, 그저 그 곳에 하나쯤 켜 놓고 어둠을 묽히었을 뿐, 도량은 밤이 되어도 눈을 쏘듯 환한 등을 켜 두는 법이 없는 곳이다. 풍경처럼 처마 끝에 조그만 불기운만 끼쳐 두되, 보름 무렵이면 그나마 꺼 버리고 환한 달빛을 살뜰히 누리던 곳이었다. 한 순간에 불이 나가 검은 땅속과도 같아진 곳, 도량을 환히 되살려 낸 것은 반딧불이들이었다! 터 닦고 앉아 있던 곳이기로, 이 산중의 주인은 사람인 줄로만 알았었다. 저 먼저 살고 있던 것들,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줄도, 그 미물이 발하는 불빛이 그렇게 영롱한 줄도 몰랐다. 산散철 결제를 준비 중이던 서른 남짓 대중들은 그 맑고 푸른 불빛에 이끌리어 밤 포행을 나서지 않고는 못 견디었다.
다리가 끊어진 지 이틀쯤 지나서, 꼭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만 길이 나고, 스무 명이 넘는 선객들이 그 길을 명줄 삼아 절로 걸어 들어왔다. 한 달 보름 동안 이어질 산철 결제에 방부 들인 수좌는 모두 쉰네 명, 하안거 때보다 다섯 명이 더 늘어난 수효였다. 끊어진 다리를 핑계 삼아 한 철쯤 쉬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 바쁘고도 간절한 일이었던 것이다. 지난 96년에 새로 번듯하게 지어진 선방, 일휴 선원장 스님 모시고, 수행이력이 40년이 넘는 선덕들이 함께 좌중하시는 천축선원이 있는 곳, 경북 울진군 서면 하원리, 태백의 강건한 줄기가 뻗어 내리다 옹골지게 맺힌 곳, 불영사는 동해 일원의 최대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땅길로도 멀고 하늘길로도 먼 곳, 91년 총무 소임을 맡으면서 살기 시작한 이 산중이, 그이 마음에는 수행자들이 머물러 공부를 하기에 오히려 맞춤한 곳이었다. 이 산중을 여법한 수행 도량으로 만들어 보리라. 그 때도 그러했지만, 십 년 세월 지난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봉화에서 울진으로 통하는 길이 포장되어 오가기 수월해진 것도 그저 바깥 사정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맑은 흙길이라 하더라도 일주문에서 도량에 이르는 십 리 길도 걸어내기가 수월찮고, 이 깊은 골에 앉은 도량이 궁금해졌더라도 인터넷으로 손쉽게 접해 볼 수도 없는 곳이다. 그이가 말했다. 절이 좀 숨은 맛도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 곳은 부처의 법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고자 이 산중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오늘 이 곳 불영사의 행자는 모두 여섯, 율의를 배우고, 예불문과 염불을 익히는 것 말고도, 그들은 날마다 삼백 배 절을 하고, 대참회문을 왼다. 그는 강원이나 기초선원의 입방을 앞둔 행자나 사미니들을 위해 강상講床을 펴고 《선가귀감》이나 <증도가>, <신심명> 따위를 가르친다. 불국사 본사에서 말사의 여행자들을 한데 모아 교육하는 일도 그가 맡은 일이다. 그의 어조는 결연하고도 뜨거워, 그의 가르침에 눈물을 쏟아 내는 사람도 많다. 서른 명 외호 대중이 늘 함께 하는 도량, 그러나 팔십 대중이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이 도량에서 일운 스님 또한 그저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머문다. 그 또한 오후 불식으로 제 몸을 법다이 단속하고, 그리고 날마다 오백 배씩 절한다. 그로서는 물처럼 흐르는 날들에 새기어 가는 대의 마디 같은 것이고, 말없이 펼쳐 보이는 후학 제접 방식이다. 불영사의 가풍은 무엇보다도 철저한 지계持戒 정신이다. 계정혜 삼학 가운데서도 계란 수행의 바탕으로 볼 만한 것이니, “사람이 활 쏘기를 배우는 데 있어, 먼저 땅을 딛는 다리를 견고히 함과도 같은 것”(화엄경)이다. 또한 자력적 삶을 강조함이니, 사방 십리 절 땅에 삼동초, 시금치, 가지, 오이 등 밭 작물을 가꾸어 쌀을 제외한 먹거리는 거의 모두 자급한다. 지난해는 삼백 근이 넘는 고추를 거두어 삼천 포기 김장을 다 감당했다.

그가 이 곳으로 온 것은 87년에 건너가서 세 해쯤 머물렀던 대만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봉녕사 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한 그가, 묘엄 은사 스님의 맏상좌이자 전강 제자이기도 한 그가 은사 스님의 노여움을 모르는 체하고 건너갔던 대만행은 뜻이 없지 않았다. 중화불학연구소에 적을 두고 세 해 동안 중국 불교의 원류를 다시금 되살피는 교학적 의미말고도, 이후로 여러 지방을 순례하면서 하화중생의 실천 현장을 보고 들으며 느낀 바가 적지 않았다. 그로서는 한국의 수행 방식과 참선의 뜻을 알리는 기회이기도 했으나, 염불 수행을 통해 활성화되어 있는 생활 불교의 면모에 깊은 인상을 받은 기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선종을 종지로 삼고 있는 한국 불교에서 그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참선법이 수승한 것이기는 하나, 선정 삼매를 증득하는 일이 사부대중 너나없이 어려운 나머지, 좌복만 지키고 앉아 혹여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점이다. 한국 불교가 위기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 이유를 그런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리 생각한다. 이론은 승勝하나 실질 면은 결하고 있는, 그래서 참된 선 정신으로 세간을 보는 안목도 부족하지는 않은지 하는 점도 안타까운 점이라 했다. 그의 그러한 마음은, 수행이 수행자 개인의 깨침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그것이 궁극으로 겨냥해야 할 바, 개공성불皆共成佛을 위한 하화중생의 실천적 삶이 바로 대승의 참뜻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듯하다.
서너 해 동안의 체류 기간 끝에 다섯 명의 대만인이 그를 은사로 삼고 출가한 것도 뜻깊은 것이었다. 대만은 본토에서 박해를 피해 나온 비구 스님들을 은사로 삼아 비구니 스님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는데, 그 즈음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대민 사업이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때였다. 그러나, 복색도 수행법도 다른 이국의 비구니 스님을 은사로 삼고 출가하는 일은 아마도 그의 경우가 처음 있는 일이었을 터였다. 이들은 모두가 한국의 봉녕사로 와서 행자 과정을 마치고 강원을 졸업한 뒤에 수계하였다. 전혀 다른 문화가 주었을 이질감을 극복하고, 사미니계를 받은 데서 끝나지 않고, 정식 스님이 되는 비구니계까지 받는 과정을 마치기까지, 무엇보다 그의 열정과 따뜻한 애정이 큰 격려가 되었을 터였다.
그 다섯 제자들은 모두 한국이나 대만에서 한결같이 수행 중이거나 포교에 힘쓰고 있다. 여법은 이 곳 선방에서 공부하다가 타이베이에서 선원을 열었다. 신도가 몇 만 명에 이르는 살림을 꾸리면서도, 온갖 대소사를 그에게 다 의논해 온다. 여법과 함께 출가한 여원은 지난해까지 이 곳 불영사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대만에 가 있다. 여심도 대만에서 포교 중이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대만인 가운데 가장 먼저 그를 은사로 삼은 여공은 대만대학을 졸업하고 출가, 인도 유학까지 마친 뒤에 지금은 대만에서 어린이 포교에 크게 힘쓰고 있다. 여항은 강원 졸업 후에는 한 해씩 소임을 맡아야 하는 법대로, 불영사에서 원주 소임을 살다가 지금은 위봉사 선원에서 정진 중이다.
대만인 제자말고도, 멀리 이탈리아에서 그를 찾아온 이도 있다. 과학 교사이던 그가, 생명의 비롯됨에 관한 의심을 품은 끝에, 8년 전 이 곳 불영사로 와 한 달 기도 끝에 출가했다. 국내의 제방 선방에서 정진하다가 현재 홍콩에서 한 철 공부 중이다. 강화도에서 국제 선원을 열고 있는 원명 스님의 소개로, 아들과 함께 그를 찾아온 러시아인도 있다. 이미 지난해에 사미니계를 받은 그는 잠시 고국에 다니러 가 있는데, 예정대로라면 내년에 비구니계를 받게 될 것이라 한다.
지난번 하안거 해제 다음날에도 그의 상좌들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이 곳 불영사로 모두 모였다. 주로 선방에서 정진 중인 그의 상좌가 마흔 명이 넘으니, 아마도 동년배 중에서는 가장 은성한 회상이 아닐까 모르겠다. 엄혹한 그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묘한 일이었다. 계를 받은 이후 중도에 수행자의 길을 접은 이는 거의 없다. 마흔 명이 넘는 상좌들의 이름은 물론, 사는 형편을 또박또박 꿰어 두고 어려운 점을 당신의 일로 삼아 주시어 그러한가, 은사 스님에 대한 공경심과 애경심이 남다른 것도 다른 도반들의 부러움을 사는 점이다. 상좌들의 돌림자를 따서 지은 여여회如如會가 이 모임의 이름이다. 소박하나마 마련해 놓고 있는 청규는 그 첫 번째 조항이 지계持戒이니, 무명을 걷어 제 속에 있는 부처를 드러내되,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할 바이라 그가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다. 사는 도량은 저마다 달라도 초발심 때 은사 스님이 강조한 것이 새롭게 환기되는 자리이다. 자자自恣로써 한 해 동안의 수행을 돌아보고 포살로써 앞으로의 원을 새롭게 세워 보는 자리이다. 위의를 갖추되, 아픈 데는 없는지, 제가 세운 원이 무리한 것은 없는지 따위가 따뜻이 점검되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동안거 때는 봉녕사로 그 자리가 옮아간다. 세배이든 생일이든, 일운 스님 자신은 세속의 예를 받는 법이 없으되, 묘엄 노스님께는 손상좌들까지 모여 함께 생신을 기뻐하는 날로 삼는다. 편견 없는 ‘중도’의 가르침을 펴시는 노스님이 그와 함께 강조하셨던 것이 ‘대중의 화애’였다. 그가 대만으로 떠날 때에는 못내 서운해 하셨던 묘엄 은사 스님은, 그가 대만에서 어떻게 법을 펴 보이며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신 뒤로는 그 마음을 많이 눅이셨더랬다. 이제 훤칠한 회상을 차린 뒤에 손상좌들과 함께 예 올리는 맏상좌가 미덥기만 할 터였다.

“제가 딛고 선 곳이 바로 제 자리이니 그 곳에서 주인되게 살아야 한다”고 옛사람이 이른 바 있었다. 그가 자리 떠나는 법이 없이 절을 지키고 앉아 ‘주인됨’의 양 축으로 삼은 것은 지역민을 대상으로 정법을 펴는 일이었다. 불심은 돈독한 편이었으나 바다를 생업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무속과 기복 신앙면이 강했던 이 곳은 그가 애쓴 끝에 정법 불교의 터로 탈바꿈되고 있다. 울진 읍내의 포교당을 비롯하여 10개 면에서 지역민을 위한 법회가 열리고, 거사 중심의 신도 조직은 인근 지역뿐만이 아니라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에 걸쳐지는 것이다. 십 년도 더 전에 그가 이 곳으로 옮겨 온 뒤로, 옛날 모습을 짐작하기 힘들 만큼 도량이 일신된 것은 그가 처음부터 목적 삼은 것이 아니었다. 이 곳 빼어난 승경을 탐하여 몰려드는 야영객은 수행의 환경을 크게 해치기로, 야영장을 철거해 달라고 울진 군청을 찾아갔던 일이 그가 관청을 몸소 찾은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었다. 그의 나이 올해로 쉰.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 그의 사십대 동안에, 일주문 건립, 울진 읍내의 포교당 건립, 인근 군부대 안에 절 신축 등, 그가 신축하고 고쳐 지은 당우는 18채에 이른다.
원효 스님도 쓰던 방편, 근기 낮은 중생이 한결 수월하게 삼매에 들 방도, 그의 불사 계획에는 염불당 짓는 일도 세워 놓고 있다 한다. 이미 설계가 끝났다 하니, 곧 신도들은 이삼 일씩이라도 형편껏 묵으면서 수행할 수 있게 될 모양이다. 또한 학림을 개원할 계획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고 있는 중이다.

그는 오늘도 법당에서 홀로 절한다. 아홉시에 시작되어 두어 시간 걸리는 그의 혼자 시간, 삼존불 거룩하게 새로 해 모신 법당에서 그는 절을 한다.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어느 날 기척도 없이 땅에 몸을 부리고 말았으나, 그것도 불심이 없지 않았던지, 가지 하나 세로로 뻗쳐 짚어 그 아래에 주차해 있던 대여섯 대 자동차가 상한 데 한 곳이 없었다. 천년 도량에 어울리는 불상 하나 모시고 싶었더니, 그 마음이 기도 끝에 영험을 보게 된 모양이었다. 절 끝에 붉은 가사는 누더기가 되었고, 그가 딛고 선 좌복도 희게 색이 바래었다. 도량 안 초목들은 가을빛이 역력하나, 그의 붉은 단심은 이미 붉으니 가을 물 따로 들 일 없을 터였다.□

취재·글/김영옥, 사진/허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