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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도시, 움직이지 않는 사막-파키스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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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통신 - 정문태 1990년 09월 103호
오늘의 부토 정부는 이처럼 파키스탄의 고질적인 민족 ·종교분쟁이나 식민 ·독재의 찌꺼기를 씻어내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인데다, 야당이 불신임안 제출을 디밀고 있고, 더구나 민주개혁을 외치는 민중의 바램에 대고 총질을 해버린 까닭에 거의 막바지에 몰린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티벳을 떠난 물방울이 북인도를 거쳐 파키스탄 북녘의 7천∼8천m 웃도는 힌두쿠시, 카라코람, 히말라야 산줄기에서 뿜어 나오는 맑은 이슬과 한데 어울려 우렁찬 인더스강을 이루더니, 파키스탄 3천km 거친 사막을 숨통을 적셔주고는 남쪽 아라비아 바다로 빠져나간다.
천만년 전, 이곳에는 유인원들이 떼지어 몰려다녔는가 하면, 5만년 전쯤에는 오늘날 인류의 할아비뻘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어림잡아 6천년 전부터는 농사짓는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뒤, 기원전 1,700년 무렵 ‘아리안’들이 중앙아시아로부터 내려와 인더스강 뚝에 ‘모헨조다로’와 ‘하랍파’라는 고대 문명도시를 세웠다.
이렇듯 거칠고 숨막히는 사막을 견디며 빚어낸 빛나는 고대문명의 영광은 희미한 그림자만 드리운 채, 오늘날 파키스탄은 903,944㎢ 땅덩어리에 이슬람교를 목숨줄로 여기며 살아가는 약 1억 5백만 명의 사람들이 끊임없는 민족·종교분쟁에 휘말리며, 대를 이은 부도덕한 정권 아래 허덕이고 있다.

파키(PAKI)가 ‘깨끗한’, 스탄(STAN)이 ‘나라’란 뜻으로, 다시 말해 힌두교도가 없는 이슬람만의‘깨끗한 나라’라는 속뜻을 지난 파키스탄은 한때 영국 식민지 아래 인디아의 한 모퉁이였으나 ‘파키스탄 운동’이라 불리운 분리독립운동을 통해 1947년 8월 마침내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다.
영국령 인디아 속에서 소수민족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은 모하멧 알리지어를 중심으로 뭉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슬람교연맹’을 앞세워 힌두국가인 인디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강력히 외쳤다.
이러한 ‘파키스탄 운동’은 1930년대 시인 모하멧 이크바르가 이슬람 젊은이들에게 독립의식을 깨우치게 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1940년 이슬람교연맹은 ‘라호르’모임에서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인디아의 각주를 한데 모아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굳은 다짐을 모았고, 결국 1947년 8월, 지리적으로 인디아를 가운데 두고 2천5백km나 떨어져 있는 동·서 2개의 파키스탄을 묶어 독립국가를 만들었다.
그뒤, 무혈쿠데타로 정권을 손아귀에 넣은 아유브 칸 장군은 10년동안 이어진 어지러운 정세를 외형적 민주화를 미끼삼아 안정세로 돌려놓고, 국내개발에 힘을 기울여 당시 세계은행으로부터 우등생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이러한 개발의 중심이 서파키스탄에만 모아져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 민중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1969년 3월 아유브 칸은 야하칸 계엄사령관에게 정권을 물려 주었고, 1970년 12월 민정이양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가 치루어졌다. 여기서, 동파키스탄 자치권을 요구하는 아와이연맹에 모아진 민중들의 뜻을 야하칸 정권은 군대를 끌고나와 짓밟아 버렸다.
마침내 아와이연맹은 인디아의 도움을 얻어 8개월에 걸친 전쟁 끝에 동파키스탄을 오늘의 방글라데시로 독립시켰다.
이렇게 해서 파키스탄은 건국 25년만에 서파키스탄은 현재의 파키스탄으로,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나누어졌다.
1972년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정권을 이어받았으나, 1977년 지아 울하크가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아 또다시 파키스탄 민중들은 11년 동안의 억눌림을 받아오던 차에, 88년 지아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죽자, 민중들의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바람은 88년 11월 선거를 통해 5년 임기의 수상 자리에 부토 전대통령의 딸 베나지르 부토(37)를 밀어 올렸다.
그러나,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를 점은 특이한 정치제제 아래 수상에 오른 부토는 집권 당시 밝힌 민주개혁에 대한 약속을 어겼고, 가족들의 부정부패, 권력남용으로 말썽을 빚고 있다.

4월 25일 파키스탄 최대도시 카라치.
아직도 거리 곳곳에 민주개혁을 바라는 포스터가 나불어 있고, 벽모퉁이 마다 ‘민중학생연합’이라는 붉은 꽤인트 글씨가 눈에 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카라치의 민주화운동은 약간 주춤한 상태다. 그렇더라도 곳곳에 중무장한 군인, 경찰의 모습이나 시민들의 움츠린 표정에서 곁보기에도 심상치 않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최근 카라치 민주화운동의 디덤터가 되었던 카라치대학을 찾아가 보았으나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정문 앞에는 기관총이 걸려 있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막아 서 있다.
대학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20분가량 실랑이를 벌이는 틈에, 지나는 한 연구소 사람이 정중히 얘기한다.
“지금 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정문 앞에 우뚝 선 카라치대학 상징탑을 바라보며, 오늘날 제 3세계의 많은 대학들이 서로 닮은 고민을 안고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겪고 있으나, 이것이 바로 역사를 부둥켜 세우고 백성의 땅을 만들어 가는 힘줄기임을 믿으며 마음 든든함을 느낀다.
한편, 카라치의 모든 신문과 방송은 오히려 카라치의 민주화운동을 접어둔 채, 북부 캐시미르 지방의 ‘스리나가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디아와의 뿌리깊은 종교·영토 싸움만을 앞다투어 떠들어대고 있으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힌두나라 인디아에 대한 나쁜 마음을 나누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디아는 피로 얼룩지고 있는 ‘스리나가르’ 종교싸움에 따른 책임을 서로 상대편에 돌리면서, 군대를 앞세운 피의 복수를 다짐하고 있어 곧 전면적인 전쟁이‘가까워 온 듯한 낌새를 볼 수 있다.
엎친데 덮친 팔이랄까, 식민통치와 30년 가까운 군사독재의 앞잡이들이 파렴치하게 이용해 먹은 ‘지역감정’의 더러운 쓰레기를 여전히 걷어내지 못한 채, ‘펀잡’주와 ‘신드’주는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고있다.
그러나, 오늘의 부토 정부는 이처럼 파키스탄의 고질적인 민족·종교분쟁이나 식민·독재의 찌꺼기를 씻어내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인데다, 야당이 불신임안 제출을 디밀고 있고, 더구나 민주개혁을 외치는 민중들의 바람에 대고 총질을 해버린 까닭에 거의 막바지에 몰린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다른 한편, 지금까지 부토수상의 권력장악을 단 한번도 인정치 않은 군부의 속마음이 또 다시 부토의 정치적 생명과 파키스탄 민중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슬랍의 휴일인 금요일 아침 무렵, ‘모헨조다로’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경찰을 흉내낸 권총강도를 만난다.
다행히 파키스탄 항공사 무장경비병들의 재빼른 도움에 탈은 없었으나 하루종일 두근거리는 마음과 뻑뻑한 긴장에 시달린다.
아래 위, 왼쪽 오른쪽으로 마구 뒤틀리는 20인승 프로펠러 비행기에 앉아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있는 터에 옆자리의 승객이 무어라 중얼거리며 열심히 기도를 한다.
이슬람교도가 아닌 나로서는 오히려 옆 사람의 기도에 더욱 불안함을 느끼며, 한편 거리마다, 상점마다, 집집마다, 심지어 공항에도 차려진 기도소에서 이토록 정성껏 기도하는 사람으로부터 당한 오늘아침의 끔찍한 사건이 떠올라 섭섭함을 느끼기도 한다.
파키스탄에 들어선 뒤 줄곧, 마치 기도를 위해 태어나 기도를 하다 삶을 마치는 듯한 이슬람 사람들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살이에 끼친 종교의 모습은 어떠했고, 그 속뜻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올바른 맺음말이 나올리야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의 참 뜻을 살피고 가날픈 사람들을 감싹주고 그들의 지평을 넓혀 주는 것이 종교의 또 하나 틀거리일진대, 바로 사람들 머리와 마음과 발로 만들어진 종교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직껏 단 한 번도 그들을 위해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번번이 못된 지배자들을 위한 무기로 팔을 바꾸어 왔을 뿐, 오히려 사람들의 참 뜻을 가두고 꺾어버리는 일에만 헛된 능력을 발휘해 왔다.
멀리 십자군의 원정이 그러했고, 오늘날 중동의 회교와 기독교 싸움이, 또 이곳 파키스탄-인도의 회교와 힌두교 싸움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숱한 독재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났던 종교의 찌그러진 꼴을 또한 유심히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덧붙여 오늘날 우리의 엄청난 종교적 영험들은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

1시간 넘게 사막을 날아, 아무런 시설도 없는 모래벌판을 ‘모헨조다로’ 공항이라고 내리란다.
비행기 문을 나서는 순간 숨조차 쉴 수 없는 뜨거운 바람이 몰려와 이곳이 과연 말로만 듣던 사막임을 깨닫게 한다.
태양을 피할 수 있는 무슨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유적지까지 데려다 줄 자동차마저 보이지 않는 벌판에서 ‘현재 기온 51℃’라는 안내원의 얘기를 듣고보니 그저 쭈빗쭈빗 웃음만 나을 뿐이다.
4천년 전 인더스강 뚝에 세워진 ‘모헨조다로’는, 오늘날 인더스강 물꼬리가 약 5㎞쯤 서쪽으로 옮겨가 버려 ‘죽음의 묵’이라 불리우며 사람이 살 수 없는 무너진 터만 덩그랗게 남아 있다.
그러나 고대 인더스문명의 시끌벅적했던 자취는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불교 사리탑을 비롯하여 사방 5㎞ 가량 되는 터에 회의장·대학·공동 목욕탕·곡물창고·관망대·요새 등이 널려있으며, 돈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와 노동자들이 살았던 동네가 비록 폐허일망정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흩어져 있다.

한나절 내리찍던 태양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추위를 느껴 긴팔 옷을 껴입고, 공항 가까이 있는 경비원들 숙소를 찾아간다.
이곳의 탤레비졍 한 대가 동네사람들의 유일한 밤놀이기 때문에 자연히 저녁을 먹고 나면 누구나 경비원 숙소로 가는 것이 마땅한 일과로 보인다.
25평 남짓한 동네사람 가운데 결혼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거친 사막에서 살아가는 용한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양젖을 얻어먹고는, 별들로 빽빽이 메워진 사막의 밤하늘을 쳐다보며 뚜벅뚜벅 걸어 숙소로 돌아온다.
다음날 아침, 무굴제국의 중심지였던 ‘라호르’로 가기 위해 이곳의 하나 뿐인 교통수단 ‘달구지’를 기다리다 한 떼의 중학생들에게 휩싸여 질문세례를 받다보니, 그 가운데 한 놈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와 한국에서 왔다니 대뜸 너희 나라는 혁명을 거친 나라냐고 묻는다. 뜻밖의 물음에 몹시 놀랐다. 이사막 한 가운데, 그것도 중학생의 관심이 사회혁명에 있을 줄이야―

사막을 질러가는 20시간 기찻길.
50℃를 웃도는 뜨거운 태양 아래기차는 말 그대로 튀김통이 되고, 열어젖힌 창으로 밀려오는 흙먼지에 온몸은 뿌옇게 덮여 버린다. 딱딱한 자리에 겨우 엉덩이만 올려 놓은 채, 맑고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꿈만이 오직 위안일 뿐이다.

사이사이 비쳐오는 파키스탄의 집들이나 풍경들이 4천년 전 ‘모헨조다로’ 유적지에 남아 있는 허물어진 문명의 찌꺼기와 너무도 닮아있다. 그렇다면, 4천년 전이나 이제나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단말인가. 눈비비며 다시 보아도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렇듯, 거칠고 힘든 삶터에 대를 이어온 사막 사람들에게 과연 생산이나 역사의 발전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으며, 그들은 또 어떤 마음으로 얘기를 받아들이겠는가.
더위 먹은 지친 머리 속에, 거의본능적으로 기도를 올리는 이슬람 사람들의 모습과 대부분 기성종교가 척박한 땅에서 돋움해 나온 까닭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