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내 영혼의 고향 해인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이달의 이야기 - 정길숙 2002년 10월 248호
녹음이 짙었던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슬슬 말라가고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따갑게 비껴드는 가을볕을 손으로 가리고 코를 벌름거리면 들숨날숨 사이로 마른 풀냄새가 가득합니다. 책 보는 일 외에는 별일이 없는 처지이고 보니 이런 날이 홀가분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며칠이 지나도 울릴 줄 모르는 전화기 저 너머의 사람들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맘때가 되면, 마음은 늘 해인사로 달려가곤 했었는데, 그리고 그 출장길에 만나는 모든 것들에 마냥 감동했었는데, 아직은 그 행복감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어서 적적하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부처님마저 나를 잊어버리시면 어쩌나 노파심이 일면 집 가까이에 있는 절로 문안을 드리러 갑니다. 치장이 근사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만불보전에 올라가면 웬만한 학교 운동장 정도 됨직한 법당에 두어 분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조용해서 좋긴 한데 동서 벽면에 빼곡이 앉아 계신 부처님이 심심하지는 않으실까 걱정이 됩니다. 108배를 올리고 다리도 풀 겸 계단을 이용해 입구로 내려옵니다. 그런데 늘 예불시간을 피해 가서 그런지, 스님은 물론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입구에 있는 안내 데스크에 누군가 앉아 있을 때도 있지만 그들도 저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는 눈치입니다. 당분간 일과 사람에게서 멀리 살아야겠다고 작심한 저로서야 상대방의 무관심이 오히려 고맙기도 하지만, 도심에서 포교당을 경영經營한다면, 글쎄요,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처음에, 직장을 옮기고 제가 맡은 일은, 성철 큰스님 사진 및 그림 전시회 개막식 준비였습니다. 책만 만들던 사람이 이런 일을 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우선 미술관을 찾아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사람들의 동선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관리실에 가서 혹시 2층에서 3층으로 올라오는 중앙 계단에 연등을 죽 달아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굳이 안내자를 두지 않아도 ‘불교’와 관계된 전시가 있는 줄 알지 않을까 싶어서였습니다. 조계사 주변에서 고운 비단 연등을 사고, 포스터를 감아줄 한지와 노끈을 사는 등 소소한 준비를 했습니다.
개막식날,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보살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멋들어지게 빼 입으셨는지, 마치 한복 전시장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한복을 입고 오셨을까? 어쨌든, 그만하면 개막 행사는 잘 치러졌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저는 스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전시기간 내에 꼭 스님이 계셨으면 좋겠고, 가능하면 큰스님 상좌 되시는 스님께서 자리를 지키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입장료가 있는 전시회는 아니었지만, 이왕 자리를 만들었으면 오시는 분들에게 확실하게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저는 절 집안 분위기에 대해서 대단히 숙맥불변菽麥不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 불교와 동떨어진 일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스님 사장님’은 처음이었거든요. 또 한 공간에서 근무를 하는 것도 아니니, 스님만 올라오시면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옆에 앉아 따따부따를 해댔으니, 스님께서 얼마나 머리가 아프고 귀가 따가우셨겠습니까. 그리고 첫 출장길에, 원주 소임을 맡고 계시는 스님께 보살이라고 부르지 말고 제 직함이나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야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과 관계가 구분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참, 당돌했지요. 돈수수죄頓首受罪를 드리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 때의 에피소드 하나. 예정된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려고 배낭을 둘러메고 원주 스님께 인사를 드리자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편지 봉투를 내주면서 차비에 보태라는 것입니다. 출장비 다 계산해서 왔는데,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며 빡빡 우겼습니다. 스님께서 참 고약하게 군다고 야단을 치시길래 받아들긴 했지만 왜 주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도회장님이 차비를 챙겨 주시는 겁니다. 이거 원, 출장 내려올 때보다 더 주머니가 두둑해졌으니, 어찌해야 싶더군요. 절집안에 ‘행자는 필이신(行者必以)’이라는 오랜 풍속이 있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서울에 돌아와서는 경리 보는 친구에게 다 주고, 한동안 식구들 점심식사 비용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첫 전시회 이후, 그 다음해에는 부산에서 성철 큰스님 그림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 책임이었습니다. 그 때서야 지난해 왜 보살님들이 한결같이 한복을 입고 오셨는지 알았습니다. 법복은 법회나 기도를 할 때 절 안에서 입는 것이지 절 밖에서 어찌 입겠냐는 것입니다. 저는 법복을 입으면 이 행사 때문에 달리 옷을 구입하지 않아도 되고, 일반 관람객과 구분도 되고, 또 옷의 평등성이 부여되지 않느냐는 논리로, 찜찜해 하시는 노보살님들을 설득해서 법복을 입기로 했습니다. 부산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애초 걱정과는 달리 전시 기간 내내 보살님들은 빳빳하게 풀 먹인 회색빛 법복을 입고 멋지게 임무를 수행해 주셨고, 모두들 대단히 만족해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조계사에서 열린 범불교대회 때에도 부산 신도들은 법복을 입고 동참을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숙맥 신세를 면하고 보니, 일반 직장과는 다른 그 무엇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접근금지 표지판이 있는 것은 아닌데, 넘어서는 안 되는 이쪽과 저쪽의 구분선이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일에 있어서는 질서 ‘보전’보다는 ‘변화·응용’을 좋아하는 입장이어서 ‘생각 바꿔 일 저질러보기’를 좋아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 욕심이 앞서고 시간에 쫓겨 짐짓 불경죄不敬罪를 범犯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속상해 할 일은 아니지만 일단 브레이크가 걸리면 거기에서 헤어나오는 데 며칠이 걸리고, 마음이란 게 묘해서 한두 번 후퇴를 하고 나니 전진을 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런 아쉬움은, 전적으로 제 자신의 무능無能에서 오는 것이고, 실수조차 아름답게 봐주시고 격려해 주신 사장 스님의 마음 씀에는 그저 백골난망白骨難忘일 뿐입니다.
그렇게 신나게 해인사 문턱을 드나든 지 6년째 되는 가을날,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큰스님 사리탑전에서 3천배 기도를 준비하는데, 해인사 단풍이 더 없이 곱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올까, 언제 다시 또 스님들 옆에서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볼까, 눈물이 났습니다. 내 어린시절을 키워준 고향집 진달래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데, 내 영혼이 살아 있었던 이 곳은 또 얼마나 그리울까, 마음이 절절해졌습니다.
그런 해인사가 개산 일천이백주년이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소망이 있다면, 일천이백년 해인사 개산법회 소식을 9시 뉴스 첫머리에서, 일간지 1면 타이틀로 보는 것입니다. 너무 과한 욕심일까요.□